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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문이 새겨진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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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자 간병인의 나직한 경고가 끝나는 순간, 요양원 복도의 차가운 정적 너머로 내면 깊숙이 묻어두었던 지독한 살기가 소리 없이 솟구쳐 올랐다.


어머니의 병실 문틀 너머로 흘러나오는 옅은 소독약 냄새가 갑자기 숨을 턱 막히게 만드는 올가미처럼 느껴졌다. 서혜영. 그 여자는 내 목줄을 쥐는 것으로도 모자라, 정신이 무너진 어머니의 머리맡에까지 감시의 눈을 심어두었다. 분노로 인해 오른손 검지 인대가 비명을 지르듯 욱신거렸고, 손목을 감싼 검은색 압박 테이프 안쪽의 맥박이 가파르게 요동쳤다.


하지만 나는 끓어오르는 살의를 억누르며 차갑게 식어 내리는 이성을 다잡았다. 지금 여기서 카메라를 부수거나 소란을 피우면, 내가 서 교수의 협박에 동요하고 있다는 사실을 역으로 노출하는 꼴이 된다. 적이 나를 완벽하게 통제하고 있다고 믿게 만들어야만, 그 방심의 틈새로 칼날을 밀어 넣을 수 있다.


나는 호흡을 고르고 천천히 어머니의 병실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침대 옆 협탁 위에 놓인 낡은 요양원 벽시계. 절대적 형태 인지안이 시계 테두리의 미세한 비대칭성을 포착했다. 시계 숫자 '12' 바로 아래, 바늘 구멍 크기만 한 초소형 광학 렌즈가 희미하게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가방에서 꺼낸 붉은 실타래와 어머니의 약 봉투를 협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병실 창가에 놓여 있던 높은 화병의 위치를 아주 미세하게, 단 3센티미터 오른쪽으로 옮겼다. 화병에 꽂힌 넓은 몬스테라 잎사귀 하나가 자연스럽게 늘어지며 벽시계의 렌즈 각도를 완벽하게 가로막았다. 카메라의 중앙 서버에서는 그저 바람에 잎사귀가 흔들려 시야가 가려진 것으로 보일 터였다.


“엄마, 나 조금 멀리 다녀와야 해. 그림을 그려야 하거든.”


잠든 어머니의 이마에 닿은 내 손끝이 차갑게 떨렸다. 어머니의 목에 감긴 자주색 스카프를 조심스럽게 여며준 뒤, 나는 최순자 간병인에게 눈빛으로 짧은 신호를 보냈다.


“부탁드릴게요, 아주머니. 외부인이 오면 즉시 제게 연락해 주세요.”


최순자는 긴장된 얼굴로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요양원을 나선 내 발걸음은 은성예고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이미 얼음처럼 굳어 있었다. 밤 9시가 넘어선 시각, 대학교와 예고의 경계선에 위치한 은성예고 본관 미술동은 거대한 묘비처럼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미술동 정문에 다다르자, 어둠 속에서 반무테안경을 쓸어 올리며 대기하고 있던 송태문 과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손에는 은성예고 행정실에서 발급된 최고 등급의 마그네틱 보안 카드키가 쥐여 있었다.


“왔군, 한소아.”


송태문의 목소리에는 특유의 비열함과 묘한 초조함이 섞여 있었다. 그는 주변을 힐끗거리며 나를 본관 지하로 안내했다. 낡은 보일러 배관이 스팀을 뿜어내며 쉭슉거리는 소리를 내는 음침한 지하 복도. 그 먼지 쌓인 통로의 막다른 벽면 앞에서 송태문이 카드키를 갖다 댔다.


띠리릭, 하는 기계음과 함께 벽면의 철제 슬라이딩 도어가 소리 없이 옆으로 밀려났다.


일반 학생들은 존재조차 모르는 공간, 본관 지하 보일러실 뒤편에 숨겨진 비밀 아틀리에가 모습을 드러냈다. 문이 열리자마자 차가운 에어컨 바람과 함께 머리가 깨질 듯한 강렬한 화학 용제 냄새가 쏟아져 나왔다. 백색의 특수 화학 조명이 떨어지는 공간 중앙에는 가로 2미터가 넘는 거대한 100호 크기의 하얀 캔버스가 모놀리스처럼 우뚝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천장 구석, 붉은색 LED 표시등이 깜빡이는 고화질 실시간 감시 카메라가 렌즈를 아래로 꺾은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서 교수님이 위에서 실시간으로 지켜보고 계신다.”


송태문이 내 어깨를 거칠게 밀며 캔버스 앞으로 나를 세웠다.


“이번 전국 미술 대전에 이사장님 아들, 준서의 이름으로 나갈 작품이다. 교수님이 건네주신 구도 기획안과 색채 배합표대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려내야 해. 네 그 잘난 손목 핑계 대며 시간 끌 생각 하지 마라. 매일 밤 10시부터 새벽 4시까지, 여기서 한 발짝도 나갈 수 없을 테니까.”


송태문은 차갑게 쏘아붙인 뒤 철문을 닫고 밖에서 잠가버렸다. 비밀 아틀리에 내부에 감도는 정막 속에서, 오직 천장의 감시 카메라가 회전하는 미세한 모터 소리만이 고막을 긁었다.


나는 가방을 열고 언니 소아가 쓰던 낡은 붉은 돼지털 붓을 꺼냈다. 손가락 관절의 통증이 찌릿하게 신경을 타고 올라왔지만, 나는 검은 압박 테이프를 더 단단히 동여매며 붓을 쥐었다.


‘시작해 볼까, 서혜영.’


나는 우선 이중 레이어 안료 은폐 기법을 작동시켰다. 겉면에 칠해질 그림은 철저히 이준서의 화풍을 모사한 평범한 아카데미풍의 정형화된 풍경화여야 했다. 나는 붓터치 호흡 역추적술을 역이용했다. 이준서처럼 재능이 없고 손끝이 무딘 자가 그릴 때 나타나는 불규칙한 필압과 둔탁한 터치의 궤적을 내 머릿속으로 계산하여, 캔버스 표면에 의도적인 '서툰 기교'의 레이어를 덧씌우기 시작했다.


슥, 슥, 거친 돼지털 붓이 하얀 캔버스를 긁어내릴 때마다, 천장의 감시 카메라는 내 손끝의 움직임을 프레임 단위로 녹화하여 서 교수의 단말기로 전송하고 있을 터였다. 화면 너머의 서 교수는 내가 자신의 지시대로 완벽히 굴복하여 이준서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고 있다고 믿으며 미소를 짓고 있으리라.


작업을 시작한 지 세 시간쯤 지났을 때, 갑자기 철문이 열리며 서혜영 교수가 직접 아틀리에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의 몸에서는 요양원에서 풍기던 소독약 냄새를 완벽히 지워버리는 값비싼 라벤더 오일 향이 진동했다.


“진척은 어떠니, 소아야?”


서 교수가 다정한 스승의 가면을 쓴 채 내 곁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내 오른손의 검은 압박 테이프를 잠시 응시하더니, 이내 아직 마르지 않은 캔버스 표면으로 손을 뻗었다. 그녀의 실크 장갑을 낀 손가락이 유화 물감의 미세한 굴곡을 쓸어내렸다.


“필치가 다소 거칠구나. 준서의 평소 터치보다 약간 더 날카로운 느낌이야.”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순간이었지만, 내 얼굴은 대리석처럼 고요했다. 나는 포커페이스 가스라이팅 역반사 기술을 가동하며 담담하게 대꾸했다.


“준서가 전국 대전에서 심사위원들의 이목을 끌려면, 평소의 둔탁함 속에 감춰진 '천재적인 우연성'이 가미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일부러 초반 레이어는 뻣뻣한 돼지털 붓으로 캔버스를 긁어 거친 마티에르를 만들었습니다. 위에 고운 바니시를 덧칠하면 완벽하게 조화될 겁니다.”


서 교수는 내 미학적 설명에 깊은 감명을 받은 듯 눈을 가늘게 뜨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소아로구나. 내 안목이 틀리지 않았어. 계속해서 작업하렴. 내일 아침에 다시 검사하러 오마.”


서 교수가 우아한 걸음걸이로 아틀리에를 빠져나가고 철문이 다시 닫혔다.


이제 남은 시간은 단 몇 분. 서 교수가 연구실로 올라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이동하는 찰나의 시간 동안, 천장의 감시 카메라는 실시간 전송 장치의 프레임 레이트 전환으로 인해 약 12초 동안 사각지대가 발생한다는 사실을 나는 윤지민의 전산 분석을 통해 이미 알고 있었다.


나는 즉시 품속에서 황 영감에게 전수받은 특수 화학 형광 안료 튜브를 꺼냈다. 육안으로는 무색투명하여 린시드 오일과 섞이면 절대 구별할 수 없는, 오직 365nm 파장의 자외선 아래에서만 푸른빛으로 각인되는 독약 같은 안료였다.


나는 가장 얇은 세필 붓 끝에 형광 안료를 미세하게 묻혔다. 그리고 캔버스 우측 하단, 이준서의 서명이 들어갈 자리 바로 아래의 캔버스 천 씨실과 날실의 미세한 틈새를 절대적 형태 인지안으로 조준했다.


손목의 파열된 인대가 한계에 달해 부르르 떨렸다. 땀방울이 눈꺼풀을 타고 흘러내려 시야를 가렸지만, 나는 이가 부러질 정도로 어금니를 깨물며 고통 임계점을 돌파했다.


‘여기서 흔들리면 끝장이다.’


나는 숨을 멈추고, 단 하나의 정밀한 궤적으로 캔버스 직조 사이에 미세하게 안료를 주입했다. 이중 서명 삽입 기술. 붓끝이 직조의 격자 틈새를 파고들며 보이지 않는 푸른 낙인을 새겨 넣었다.


S-O-A-H.


서명을 마친 나는 즉시 형광 안료 튜브를 숨기고, 일반 린시드 오일을 그 위에 얇게 덧발라 안료의 굴절률을 투명하게 맞추었다. 겉보기에는 그저 평범한 하얀 패브릭의 질감일 뿐이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가방 구석에서 자외선(UV) 검사용 휴대용 랜턴을 꺼냈다. 내 몸으로 감시 카메라의 각도를 완벽하게 가로막은 채, 랜턴의 전원을 켰다.


차가운 보라색 광선이 캔버스 우측 하단을 비추었다.


순간, 아무것도 없던 하얀 천 위로, 죽은 언니의 이름 'So-ah'가 마치 차가운 심연에서 솟구쳐 오른 유령의 지문처럼 선명한 푸른빛으로 번뜩였다. 지독하게 아름답고 처절한 복수의 낙인이었다.


랜턴을 끄자 푸른 빛은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다시 평범한 이준서의 대작 캔버스로 돌아갔다. 내 오른손 검지 끝은 유독한 화학 안료의 영향으로 파랗게 마비되어 가고 있었지만, 내 입가에는 서늘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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