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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의 제안과 붉은 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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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서의 이름이 금박으로 새겨진 포트폴리오 기획안. 그 두꺼운 가죽 표지를 넘기자마자 내 눈을 찌른 것은, 예상대로 어머니의 요양병원비 영수증 사본이었다. 미납 연체료가 붉은 글씨로 선명하게 찍힌 종이 위로 서혜영 교수의 고상한 손가락이 미끄러지듯 다가왔다.


“준서가 이번 전국 미술 대전에 출품할 대형 유화 작업이 필요하단다. 네가 준서의 ‘손끝’이 되어 조금만 도와주면 좋겠구나. 요양원에 계신 네 어머니의 병원비와 특별 치료비는 내가 모두 책임질 테니, 너는 오직 캔버스에만 집중하렴.”


서 교수의 목소리는 한없이 우아하고 부드러웠다. 하지만 그것은 내 목을 조르는 보이지 않는 뱀의 슉슉거림과 다름없었다. 그녀는 내 유일한 혈연이자 정서적 아킬레스건인 어머니 이민자를 인질로 잡고 있었다. 내가 이 제안을 거절하는 순간, 어머니는 차가운 길바닥으로 쫓겨나거나 더 끔찍한 정신병원 폐쇄 병동으로 강제 이송될 터였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살의가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다. 오른손 검지 끝의 찢어진 상처가 욱신거렸고, 손목에 감긴 검은 압박 테이프 안쪽의 신경이 비명을 질렀다. 당장이라도 저 고상한 가식의 얼굴을 조각칼로 찢어발기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한소윤이다. 철저한 분석과 계산으로 지옥에서 걸어온 설계자. 여기서 분노를 드러내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간다.


나는 의도적으로 몸을 바르르 떨었다. 오른손을 들어 올리며 손끝을 가늘게 흔들었다. 겁에 질려 어쩔 줄 모르는, 서 교수가 그토록 지배하기 쉬워했던 과거의 유약한 ‘한소아’의 모습을 완벽하게 연기해 냈다.


“교수님…… 제가, 제가 어떻게 준서의 그림을…… 제 손목이 이래서 큰 그림은 그릴 수 없어요.”


내 목소리는 떨렸고, 눈가에는 억지로 짜내지 않아도 흘러내릴 듯한 초조함이 맺혔다. 서 교수는 내 떨리는 손을 만족스럽게 내려다보며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그녀에게는 이 두려움에 가득 찬 제자의 모습이 가장 완벽한 예술적 도구로 보였을 것이다.


“걱정할 것 없다, 소아야. 네 손목 상태는 내가 잘 알고 있지 않니? 미세한 필압을 통제하기 어렵다면, 내가 특별한 조색 레시피와 구도 가이드를 제공해 주마. 그리고 준서의 수석 졸업이 확정되면, 내 이름으로 발급되는 명문대 추천서 쿼터는 온전히 네 것이 될 거야. 네 미래를 위해서라도 이 정도 협조는 당연한 선택이겠지?”


서 교수의 말 뒤편에는 ‘거절하면 네 어머니의 숨통을 끊겠다’는 무언의 칼날이 번뜩이고 있었다. 그녀는 추천서라는 달콤한 독배를 내밀며 나를 완벽한 공범의 늪으로 밀어 넣으려 하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깊이 숙였다. 억울함과 공포에 굴복한 척, 어깨를 잘게 떨며 대답했다.


“……네, 교수님.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준서의 그림을…… 제가 그리겠습니다. 다만, 제발 어머니의 요양병원만큼은 편안하게 계실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그래, 착하구나 소아야. 역시 나를 실망시키지 않는구나.”


서 교수가 내 어깨를 다정하게 감싸 안았다. 그녀의 실크 블라우스에서 풍기는 짙은 라벤더 오일 향이 코끝을 찔렀다.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지만, 나는 대리석처럼 굳은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 이제 덫은 놓였다. 내가 그녀의 제안을 수락함으로써, 대작 카르텔의 가장 깊숙한 안방으로 들어갈 자격을 얻었다. 동시에 이준서의 그림에 서 교수를 파멸시킬 결정적인 ‘물리적 덫’을 심을 기회도 확보했다.


***


교무실을 빠져나온 나는 즉시 외곽 버스에 몸을 실었다.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회색빛 서울 도심의 풍경이 내 차가운 내면과 닮아 있었다. 버스가 덜컹거릴 때마다 손목 인대의 통증이 척추를 타고 찌릿하게 올라왔지만, 머릿속은 오직 다음 단계를 향한 계산으로 가득 차 있었다.


‘서 교수가 요양원비 지원금을 매개로 내 목줄을 쥐려 한다면, 나는 배후에서 그 족쇄를 끊어낼 우회로를 만들어야 한다.’


나는 주머니 속 무기명 체크카드를 만지작거렸다. 최현준이 동맹의 증표로 제공했던 사설 정보 자금. 나는 스마트폰을 꺼내 현준에게 극비 메시지를 전송했다.


[요양원 비상 자금 확보 필요. 무기명 자금 중 일부를 이민자 환자의 가상 계좌로 즉시 예치해 줘. 서 교수가 요양원비를 중단하는 즉시 자동으로 결제되도록 우회 결제망을 구축해야 해.]


현준의 답장은 빠르고 간결했다.


[조치 완료. 금융 추적이 불가능한 우회 사설 신탁 계좌로 예치해 뒀어. 서혜영이 요양원 결제 시스템을 확인해도 외부 자금 유입 경로를 알아낼 수 없을 거야. 신변 조심해.]


차가운 동맹의 확실한 일 처리였다. 이로써 서 교수가 들이밀 가장 치명적인 재정적 인질 카드는 무력화되었다. 적어도 어머니가 갑자기 병원 밖으로 쫓겨날 위험은 사라진 것이다.


버스가 경기도 외곽의 한적한 숲길을 지나 ‘햇살병원 요양원’ 정문에 멈춰 섰다.


이곳은 서 교수의 화려한 연구실과는 극명하게 대비되는, 소독약 냄새와 쓸쓸한 정막만이 감도는 공간이었다. 백색 광이 떨어지는 차가운 복도를 지나 302호실의 문을 열었다.


병실 안쪽 구석, 창가에서 들어오는 희미한 오후 햇살 아래에 어머니 이민자가 앉아 있었다. 초췌한 안색에 항상 부어 있는 눈가. 그녀의 목에는 죽은 언니 소아의 유품인 자주색 스카프가 늘어져 있었다. 스케치북에 연필로 끊임없이 시든 꽃을 그리던 어머니가 문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어마마……”


어머니의 초점 없는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순간, 그녀의 얼굴에 믿을 수 없는 환희의 빛이 서렸다. 어머니는 쥐고 있던 연필을 떨어뜨리며 내게로 손을 뻗었다.


“소아야……! 우리 소아 왔니? 왜 이제 왔어…… 엄마가 미안해. 그날 밤 문을 열어줬어야 했는데…… 소아야!”


어머니는 나를 죽은 언니 ‘한소아’로 착각하고 있었다. 해리성 장애가 올 때마다 어머니의 기억은 소아가 죽던 그 참혹한 밤에 멈춰 서 있었다. 나를 끌어안고 어깨를 적시며 우는 어머니의 마른 등을 토닥이는 동안, 내 가슴속에는 슬픔과 죄책감이 거대한 바위처럼 내려앉았다.


‘엄마, 나는 소아가 아니야. 나는 엄마가 잊어버린 가짜, 한소윤이야.’


하지만 나는 그 진실을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었다. 어머니의 정신적 안정을 위해서도, 그리고 내 복수의 완성을 위해서도 나는 철저히 소아의 유령이 되어야 했다. 나는 어머니의 마른 손을 꽉 잡으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응, 엄마. 나 여기 있어. 이제 아무 데도 안 가.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어머니는 내 손등의 굳은살과 상처를 보며 눈물을 흘렸다. 모성적 안목으로 내 손의 이질감을 느꼈을 텐데도, 자식을 잃은 극심한 슬픔은 그 이성적 의심마저 덮어버린 듯했다. 어머니를 침대에 눕히고 잠들 때까지 곁을 지켰다.


병실 문이 조용히 열리며 담당 의사 김성우가 들어왔다. 그는 차트를 보며 내게 조용히 눈짓을 건넸다. 복도로 나온 김 의사는 피로가 찌든 얼굴로 내게 경고를 건넸다.


“한소아 학생. 최근에 서혜영 교수 측 비서가 다녀갔습니다. 병원에 거액의 후원금을 내겠다는 핑계로 어머니의 정신 감정 기록과 강제 퇴원 가능 여부를 은밀히 캐묻고 갔어요. 병원 재단 이사회 쪽에서도 서 교수의 눈치를 보고 있어서, 제가 언제까지 방어해 줄 수 있을지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선생님. 어머니의 진료 기록만큼은 절대 외부로 유출되지 않도록 법적으로 지켜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최선을 다하겠지만, 저들의 압박이 더 거세지면 저도 버티기 힘듭니다. 조심하세요.”


김 의사의 경고는 차가운 현실이었다. 서 교수의 마수는 이미 요양원의 행정망까지 깊숙이 침투해 있었다.


김 의사와 대화를 마치고 다시 어머니의 병실로 돌아가려던 찰나, 복도 모퉁이의 그늘진 곳에서 전담 간병인 최순자가 내 팔을 은밀하게 잡아끌었다. 그녀는 주변을 극도로 경계하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소아 양, 잠깐만요.”


최순자의 눈빛에는 단순한 걱정을 넘어선 깊은 공포와 경고의 빛이 서려 있었다. 그녀는 주머니에서 낡은 수첩 하나를 꺼내 쥐며 내 귀에 바짝 입을 대고 속삭였다.


“며칠 전에 서 교수의 비서라는 여자가 다시 찾아왔었어요. 그런데 단순히 병원비 얘기만 한 게 아니에요.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어머니 병실 구석구석에 아주 작은 카메라 장치 같은 걸 숨겨두고 가는 걸 내가 똑똑히 봤어요. 여기 면회 일지랑 그 비서가 다녀간 시간 적어뒀으니까 꼭 확인해 봐요.”


순간, 내 눈빛이 얼음장처럼 차갑게 가라앉았다. 서 교수의 감시가 이미 어머니의 병실 내부까지 도달해 있었다. 손목 테이핑 안쪽의 인대가 분노로 부르르 떨렸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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