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장된 적대, 사선 위의 공조
목요일 아침, 은성예술고등학교 미술동 실기실 제4실의 공기는 유난히도 무겁고 차가웠다. 창가 틈새로 스며든 희미한 아침 햇살은 연필 흑연 가루와 테레핀유 냄새가 뒤섞인 실기실의 음산한 정적을 깨우지 못했다.
나는 내 이젤 앞에 서서 오른손목을 내려다보았다. 교복 소매 안쪽, 검은색 특제 압박 테이프가 살을 파고들 듯 단단하게 감겨 있었다. 어제 대강당에서 치러진 기습 라이브 크로키 시험의 여파는 상상 이상이었다. 유미란 보건 교사가 주입해 주었던 국소 마취제의 기운은 간밤에 완전히 소멸했고, 그 대가로 오른손 검지 끝과 손목 인대에는 송곳으로 뼈를 긁어내는 듯한 극심한 반동 통증이 몰아치고 있었다. 손가락 끝을 미세하게 움직일 때마다 척추를 타고 서늘한 전율이 흘렀다.
가방 안쪽 깊은 곳에는 최현준이 동맹의 증표로 건넸던 은색 만년필이 들어 있었다. 언니 소아의 빛바랜 핏자국이 굳어 있는 그 펜은, 내 주머니 속 무기명 체크카드와 함께 내가 짊어진 복수의 무게를 실시간으로 증명하고 있었다.
‘흔들리지 마, 한소윤. 이제 겨우 첫 발을 뗐을 뿐이야.’
나는 심호흡을 하며 차가운 이성을 다잡았다. 오늘부터 최현준과 나는 철저한 가짜 적대 관계를 연기해야 했다. 서혜영 교수와 아틀리에 아르케의 집요한 의심을 피하기 위해, 우리는 서로의 목을 겨누는 라이벌이 되어야만 했다.
드르륵.
실기실 문이 열리며 은빛이 도는 밝은 갈색 머리칼을 단정하게 빗어 넘긴 사내가 걸어 들어왔다. 최현준이었다. 그는 오른손목에 특유의 검은색 가죽 아대를 착용한 채,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단정한 교복 차림으로 이젤 사이를 걸어왔다. 그의 서늘한 눈동자가 나를 스쳐 지나갔다. 그 눈빛에는 어젯밤 내 지하 단칸방에서 흘렸던 참회의 눈물도, 비장한 속죄의 결의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오직 기득권 천재 특유의 오만함과 냉소만이 가득했다.
그가 내 이젤 옆을 지나치며 어깨를 가볍게 부딪쳤다. 툭, 하는 마찰음과 함께 그가 낮고 차가운 목소리로 뱉어냈다.
“비켜, 한소아. 실기실 입구를 네 초라한 이젤로 막고 서 있는 거, 꽤나 거슬리니까.”
실기실 내부에 있던 몇몇 학생들이 숨을 죽이고 우리를 훔쳐보았다. 서지민의 하수인들이 입꼬리를 올리며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현준을 향해 몸을 돌리며,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맞받아쳤다.
“실기실이 네 개인 화실이라도 되는 줄 아나 보네, 최현준. S등급 수석 자리가 그렇게 불안하면 몸조심이나 해. 언제 내 손끝에 짓밟힐지 모르는 일이니까.”
“하, 쥐뿔도 없는 게 기어오르는군. 재미있어, 어디 끝까지 버텨봐.”
현준은 차갑게 비웃으며 자신의 창가 자리로 걸어갔다. 완벽한 연극이었다. 주변 학생들의 눈빛에서 우리 둘 사이의 적대감이 진짜라는 확신이 읽혔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던 찰나, 실기실 문틀에 행정실 계약직 직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소아 학생, 서혜영 교수님께서 지금 개인 연구실로 오라고 하십니다. 즉시 이동하세요.”
순간, 심장이 가파르게 요동쳤다. 서 교수의 기습 호출. 나는 소매 안쪽의 검은 압박 테이프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 표정을 차가운 대리석처럼 고정했다.
***
미술동 5층 최상층에 위치한 서혜영 교수의 연구실은 고가의 수입 라벤더 오일 향과 정제된 유화 물감 냄새가 은은하게 풍기고 있었다. 바닥에 깔린 하얀색 양카펫은 내 지하 단칸방의 눅눅한 먼지 바닥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며, 이곳이 은성예고의 절대 권력이 지배하는 성역임을 온몸으로 웅변하고 있었다.
“어서 오렴, 소아야.”
고급스러운 실크 블라우스에 진주 목걸이를 한 서 교수가 단아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맞이했다. 그녀는 소파에서 일어나 천천히 내게로 다가왔다. 우아한 걸음걸이였지만, 내 눈에는 먹잇감을 노리는 거미의 움직임처럼 기괴하게 비쳤다.
서 교수가 내 앞에 멈춰 서더니, 불쑥 내 오른손목을 부드럽게 쥐었다. 순간, 굳어 있던 손목 인대에 가해진 미세한 압력 때문에 비명이 터져 나올 뻔했다. 나는 어금니를 깨물며 심장 박동을 의도적으로 늦추었다. 눈동자 하나 흔들리지 않는 완벽한 포커페이스를 유지해야 했다.
“손목은 좀 어떠니? 오늘 아침 실기실에서 현준이와 사소한 다툼이 있었다고 들었다만.”
그녀의 손가락 끝이 내 검은 압박 테이프 위를 천천히 쓸어내렸다. 미세한 탐색. 내 신체적 결함과 대인 관계를 동시에 흔들어보려는 교활한 포석이었다.
“재능이란 참으로 부서지기 쉬운 법이란다, 소아야. 마치 얇은 유리잔 같아서, 내 보살핌과 통제 아래 있을 때만 온전히 빛을 발할 수 있지. 현준이 같은 거친 아이들과 부딪쳐서 네 귀한 손을 망치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겠니?”
은근한 협박이자 자존감을 짓밟는 가스라이팅의 서막이었다. 나는 고개를 약간 숙이고, 어깨를 미세하게 바르르 떨었다. 언니 소아가 생전 그녀 앞에서 보여주었던 유약하고 겁먹은 천재의 표정을 온몸의 근육으로 완벽하게 모사해 냈다.
“죄송합니다, 교수님…… 제가 생각이 짧았어요. 교수님의 지도가 없으면 저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어요.”
서 교수의 입꼬리가 만족스럽게 호선을 그렸다. 그녀는 쥐고 있던 내 손목을 부드럽게 놓아주었다. 첫 번째 경계 완화였다.
“그래, 착하구나. 역시 너를 가장 잘 이해하는 건 이 어미 같은 나뿐이란다.”
서 교수는 방 구석에 놓인 이젤로 걸어갔다. 그 위에는 회색 벨벳 천으로 덮인 캔버스가 놓여 있었다. 그녀가 천을 걷어내자, 최현준의 최신 유화 스케치 한 점이 모습을 드러냈다. 날카로운 투시도법과 차가운 기하학적 구도가 돋보이는 차가운 도시의 풍경화였다.
“이건 현준이가 어제 제출한 신작 초안이란다. 소아야, 네가 보기에 현준이의 이 그림은 어떻니? 아주 객관적이고 날카로운 미학적 비평을 듣고 싶구나. 이 구도의 모순을 지적해 보렴.”
숨이 막히는 질문이었다. 이것은 단순한 비평 요구가 아니었다. 만약 내가 현준의 그림을 과도하게 칭찬한다면 나와 현준 사이의 은밀한 교류나 감정적 연대를 의심할 터였고, 반대로 터무니없이 깎아내린다면 내 미학적 안목의 부활을 의심받을 터였다. 서 교수는 내 천재성의 진위와 현준과의 관계를 동시에 저울질하는 덫을 놓은 것이다.
나는 마음을 얼음처럼 차갑게 식혔다. 그리고 뇌 속에서 ‘미학적 가스라이팅 방어술’을 가동했다.
나는 한 걸음 다가가 현준의 캔버스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절대적 형태 인지안이 그림의 모든 선과 비례를 쪼개어 분석했다. 나는 목소리 톤을 한 단계 낮추어, 지극히 학구적이고 냉소적인 비평가처럼 입을 열었다.
“구도는 완벽합니다. 자로 잰 듯한 1점 투시와 빌딩들의 비례 배치는 조형학적으로 흠잡을 데가 없네요. 하지만…….”
나는 일부러 말을 흐리며 서 교수의 눈빛을 살폈다. 그녀의 눈동자에 호기심이 서리는 것을 포착한 순간, 나는 가스라이팅 역반사 화법의 칼날을 뽑아 들었다.
“지나치게 차갑고 기계적입니다. 캔버스 전체를 지배하는 선들이 교수님의 위대한 미학 이론인 ‘감성적 마티에르의 확장’을 정면으로 위배하고 있어요. 기교는 화려하나 영혼이 텅 비어 있습니다. 감상자의 마음을 흔드는 날것의 생명력이 결여되어 있어요. 최현준은 아직 교수님의 깊은 가르침을 머리로만 이해할 뿐, 가슴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이 비평은 현준의 기술적 완벽함을 인정하면서도, 서 교수가 평소 신봉하고 가르치던 미학 이론을 극찬하는 동시에 현준을 ‘가르침을 받지 못한 미완의 학생’으로 격하시키는 고도의 심리적 회피술이었다.
서 교수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내 입에서 나온 완벽한 미학적 논리와 자신을 향한 은밀한 찬사에 그녀의 소시오패스적인 자존심이 극도의 만족감을 느낀 기색이 역력했다.
“아……! 소아야, 네가 드디어 진짜 눈을 떴구나.”
서 교수는 감탄사를 터뜨리며 내 비평에 완전히 동조했다.
“정확해. 현준이의 저 그림은 기교만 번지르르한 죽은 도면에 불과해. 내 가르침의 본질을 꿰뚫고 있는 건 역시 너뿐이로구나. 내 지도가 너를 다시 진짜 천재로 완성하고 있어.”
그녀의 의심이 완전히 신뢰로 뒤바뀌는 순간이었다. 나는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며, 손가락 굳은살을 손톱으로 강하게 눌러 고통으로 터져 나오려는 실소를 억눌렀다. 내 이성적인 비평과 굴종 연기가 그녀의 거만한 방어벽을 완벽히 무너뜨린 것이다.
서 교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이젤 뒤편의 책상 서랍을 열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묵직한 가죽 포트폴리오 파일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파일 표지에는 이사장 아들이자 아틀리에 아르케의 가짜 천재, ‘이준서’의 이름이 금박으로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준서가 이번 전국 미술 대전에 출품할 대형 유화 작업이 필요하단다. 네가 준서의 ‘손끝’이 되어 조금만 도와주면 좋겠구나.”
가죽 파일이 내 마비된 오른손 끝에 닿는 순간, 뇌리 속에서 차가운 경보음이 울렸다.
대작 카르텔의 직접적인 입구. 언니를 죽음으로 몰고 간 그 추악한 범죄의 덫이, 마침내 내 눈앞에 완전히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Chưa có bình luận nào. Hãy là người đầu tiê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