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범의 조건, 차가운 동맹
대강당의 화려한 조명이 꺼진 뒤, 미술동 복도에 몰아치는 정적은 한층 더 차갑고 무거웠다.
기습적으로 도입된 라이브 크로키 시험에서 오성록 교수의 비명과 함께 S등급의 압도적인 예술성을 증명해 냈지만, 내 오른손은 이미 한계를 넘어선 상태였다. 단상 뒤편, 사람들의 눈길이 닿지 않는 화장실 구석으로 들어서자마자 손가락을 칭칭 감고 있던 압박 테이프를 거칠게 뜯어냈다.
“아윽……!”
살점이 뜯겨 나가는 고통과 함께 테이프 안쪽에서 고여 있던 붉은 피가 세면대 화강암 위로 번졌다. 국소 마취제의 효력이 급격히 소멸해가며, 인대가 찢어진 오른손 검지 마디마디에서 송곳으로 뼈를 후벼 파는 듯한 극심한 반동 통증이 몰아쳤다. 손끝이 파랗게 질린 채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바라보며, 나는 이를 악물고 차가운 물에 손을 담갔다. 고통을 분노의 연료로 치환하는 것도 육체적인 한계 앞에서는 지독한 형벌에 불과했다.
그때, 교무실 행정 직원을 통해 서혜영 교수의 호출이 전달되었다.
유리벽 너머로 고가의 수입 양카펫과 안락한 가죽 소파가 배치된 서 교수의 개인 연구실은, 위선적인 미학의 향취로 가득 차 있었다. 서 교수는 단아한 진주 목걸이를 매만지며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있었다. 그녀의 눈빛은 우아한 스승의 가면을 쓰고 있었지만, 그 너머에는 날카로운 탐욕이 도사리고 있었다.
“소아야, 오늘 대강당에서의 시연은 정말 놀라웠단다.”
서 교수의 목소리는 상냥했으나, 그 안에는 뼈를 찌르는 가스라이팅의 독침이 숨겨져 있었다.
“너의 천재성이 다시 돌아온 것 같아 이 어미의 마음처럼 기쁘구나. 하지만 기억하렴. 독창적인 재능이란 유리잔과 같아서, 내 보살핌과 통제가 없다면 한순간에 산산조각이 나고 마는 법이란다. 네가 은성예고에서 네 자리를 지킬 수 있는 건, 오직 내가 네 배경이 되어주기 때문이야.”
나는 고개를 숙인 채, 손목 아대를 쥔 손을 바르르 떨며 유약하고 나약한 ‘한소아’의 인격을 완벽하게 사칭했다. 두려움에 질린 듯한 눈빛으로 바닥을 응시하는 내 모습은, 서 교수의 지배 욕구를 완벽하게 충족시켜 주었을 것이다.
“네, 교수님…… 잘 알고 있어요. 제게는 오직 교수님뿐이에요.”
서 교수의 입꼬리가 만족스럽게 올라갔다. 그녀는 테이블 위에 놓인 두꺼운 가죽 포트폴리오 파일을 내밀었다. 이사장 아들이자 아르케의 가짜 천재인 이준서의 이름이 금박으로 새겨진 기획안이었다.
“준서가 이번 전국 미술 대전에 출품할 대형 유화 작업이 필요하단다. 네가 준서의 ‘손끝’이 되어 조금만 도와주면 좋겠구나. 요양원에 계신 네 어머니의 병원비와 특별 치료비는 내가 모두 책임질 테니, 너는 오직 캔버스에만 집중하렴.”
어머니를 인질로 삼은 교묘한 대작 강요. 나는 끓어오르는 살의를 억누르며 비굴하게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교수님…… 시키는 대로 하겠어요.”
그것으로 서 교수의 완전한 방심을 유도하고 카르텔의 가장 깊숙한 안방으로 진입할 교두보를 확보했다. 하지만 연구실을 빠져나와 지하 단칸방으로 돌아가는 길, 밤바람은 유난히도 차가웠다.
***
눅눅한 습기와 곰팡이 냄새, 그리고 낡은 이젤 주변을 감도는 기름물감 향.
지하 단칸방은 세상으로부터 나를 철저히 격리하는 차가운 대피소였다. 방 안의 구형 빔프로젝터가 벽면에 쏘아 올린 언니 소아의 작업 영상이 푸른 잔상으로 방 안을 채웠다. 손목의 신경통이 심장을 찌르듯 밀려왔지만, 나는 진통제를 삼키며 이젤 위에 언니의 미완성 스케치북을 펼쳐놓았다.
그때였다.
철컥, 철컥.
지하 단칸방의 낡은 철문 도어락이 거칠게 흔들리는 소리가 들렸다. 배송 기사나 이웃이 올 리 없는 깊은 밤이었다. 심장이 가파르게 요동쳤다. 서 교수가 보낸 사냥개 박 실장인가?
스르륵, 문이 열리며 어두운 문틀 사이로 장신 체격의 실루엣이 걸어 들어왔다. 은빛이 도는 밝은 갈색 머리칼이 희미한 가로등 빛을 받아 번뜩였다. 오른손목에 검은색 특제 가죽 아대를 착용한 사내. 은성예고 실기 1위이자 대기업 재단의 황태자, 최현준이었다.
그는 방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등 뒤로 문을 쾅 닫았다. 그의 서늘한 눈동자가 방 안의 낡은 이젤과 벽면의 빔프로젝터 영상을 빠르게 훑었다. 그리고 내 얼굴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차갑고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한소윤.”
내 진짜 이름이 그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순간, 척추를 타고 소름 끼치는 냉기가 뿜어져 나왔다. 정체가 완전히 탄로 난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최현준은 품속에서 두꺼운 서류 봉투를 꺼내 내 발밑에 툭 던졌다. 봉투가 벌어지며 내 진짜 주민등록등본과 사망 신고가 유예된 한소아의 행정 서류 사본, 그리고 어머니 이민자의 요양원 입원 기록지들이 흩어졌다.
“한소아는 반년 전에 이미 죽었어. 그리고 내 눈앞에 서 있는 너는, 소아의 옷을 훔쳐 입은 쌍둥이 동생 한소윤이지. 사설 탐정을 동원해 네 옛 동네와 요양원을 뒤지는 건 일도 아니더군.”
그의 목소리에는 기득권 특유의 오만함과 날카로운 확신이 서려 있었다. 이대로 정체가 드러나면 은성예고에서의 모든 복수극은 공문서 위조와 업무방해죄라는 법적 파멸로 귀결될 터였다.
하지만 나는 무너지지 않았다.
‘여기서 밀리면 끝이다. 이 사냥개의 이빨을 뽑아버려야 해.’
나는 가방 옆 칸에 꽂혀 있던 정우진 교수의 구형 조각칼을 은밀히 움켜쥐었다. 손목의 통증을 억누르며, 나는 절대적 형태 인지안을 가동해 최현준의 무게 중심과 관절의 회전축을 순식간에 계산해 냈다.
슈욱!
망설임 없는 고속의 궤적과 함께, 나는 조각칼의 서슬 퍼런 쇠날을 최현준의 경동맥 앞 1cm 지점에 자로 잰 듯 정확하게 밀착시켰다. 칼날의 차가운 촉감이 그의 목덜미에 닿는 순간, 최현준의 숨소리가 턱 막혔다.
“움직이지 마.”
내 목소리는 지하방의 습기보다 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네가 내 진짜 이름을 학교나 서 교수에게 발설하는 순간, 이 조각칼이 네 잘난 목줄을 먼저 끊어놓을 테니까. 네 가문의 돈과 권력도 죽은 시체 앞에서는 아무런 방패가 되지 못해.”
일촉즉발의 대치 상황. 그러나 최현준은 내 목전의 칼날 앞에서도 피하지 않았다. 그의 눈동자 속에는 나를 향한 분노나 공포가 아닌, 깊고 어두운 심연의 고통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의 호흡이 가빠지며 목덜미의 경동맥이 조각칼 끝에서 미세하게 파르르 떨렸다.
나는 절대적 형태 인지안을 통해 그의 미세 표정을 낱낱이 해체했다. 눈동자의 흔들림, 입술 근육의 비정상적인 수축, 그리고 그의 검은 가죽 아대 안쪽에서 전해지는 가파른 맥박수. 그것은 거짓이나 위선이 아니었다. 지독한 자기 파괴적인 죄책감과 슬픔의 파동이었다.
“죽여…… 죽이고 싶으면 기꺼이 찔러.”
최현준의 목소리가 갈라지며 젖어 들었다. 오만하던 천재의 가면이 무참히 깨져나가며, 그의 눈가에 뜨거운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내가 소아를 죽음으로 몰고 간 공범이야.”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충격적인 자백에 내 손끝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소아가 자살하기 전날 밤, 내게 전화를 걸었어. 서 교수의 대작 압박에 숨이 막혀 죽을 것 같다고, 제발 도와달라고 울부짖었지. 하지만 난…… 내 S등급 수석 자리를 지키느라, 서 교수의 눈 밖에 나기 싫어서 그 전화를 비겁하게 외면했어. 심지어 평론가들 앞에서 소아의 그림을 영혼 없는 카피 캣의 기교일 뿐이라며 깎아내리기까지 했지. 내가 소아의 마지막 구명줄을 내 손으로 끊어버린 거야.”
최현준은 무너지듯 내 발밑에 무릎을 꿇었다. 그의 넓은 어깨가 지독한 참회로 인해 잘게 떨렸다. 그는 주머니에서 은색 만년필 하나를 꺼내 떨리는 손으로 내게 바쳤. 만년필 캡 부분에는 소아가 마지막 순간 Desperate하게 움켜쥐며 남겼던, 빛바랜 핏자국이 굳어 있었다.
“이건 소아가 내게 남긴 마지막 유품이야. 매일 밤 이 만년필을 쥘 때마다 지옥 같은 죄책감이 내 손목을 죄어왔어. 오늘 대강당에서 네가 피를 흘리며 선을 긋는 모습을 보았을 때, 소아가 내 죄를 벌하러 살아 돌아온 줄 알았어.”
그는 고개를 들어 내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의 눈물 어린 눈동자 속에는 처절한 속죄의 결의가 불타오르고 있었다.
“내 손목을 가져가도 좋아. 가문의 자금과 정보력, 아틀리에 아르케 내부의 모든 기밀을 네게 바칠게. 서혜영과 그 위선적인 카르텔 놈들을 내 손으로 직접 파멸시킬 수만 있다면, 난 기꺼이 네 사냥개가 되겠어. 그러니까…… 제발 날 네 복수의 도구로 써줘.”
피 묻은 은색 만년필을 쥐고 내 앞에 무릎을 꿇은 최강의 라이벌.
나는 조각칼을 천천히 거두어 품속에 넣었다. 그리고 그가 바친 만년필을 차갑게 쥐어 들었다. 언니를 죽음으로 몰고 간 간접적 가해자 중 한 명과 손을 잡아야 한다는 도덕적인 혐오감이 가슴을 찔렀지만, 내 이성은 냉철하게 계산하고 있었다. 거대 재단과 서 교수를 무너뜨리기 위해선, 이 사냥개의 돈과 권력이 가장 날카로운 칼날이 될 터였다.
“좋아. 그 속죄의 맹세, 기꺼이 수용하지.”
나는 무릎 꿇은 최현준의 손을 거칠게 잡아 일으켰다.
“하지만 기억해, 최현준. 중간에 멈추거나 도망치려 한다면, 그땐 네 가문 전체가 이 피의 캔버스 아래 묻히게 될 테니까.”
지하 단칸방의 어두운 전등 빛 아래, 복수를 위한 가장 위험하고 차가운 공범의 동맹이 마침내 체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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