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면의 시작, 은성예고로의 침투
비릿한 테레핀유 냄새와 석탄 연필의 건조한 흑연 가루가 공기 중에 서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은성예술고등학교 미술동 실기실 제4실. 겉으로는 우아한 클래식 음악이 흐르고 고상한 석고상들이 줄지어 서 있는 예술의 성소였으나, 그 본질은 가혹한 피라미드였다. 부모의 재력과 서혜영 교수의 추천서 한 장에 따라 학생들의 계급이 S등급부터 F등급까지 칼같이 갈리는 곳. 그 숨 막히는 서열의 전장으로 한 여자가 걸어 들어왔다.
‘들이쉬고, 내쉬고.’
한소윤은 심장박동을 인위적으로 통제하며 실기실의 무거운 철문을 밀었다. 문이 열리는 날카로운 마찰음과 함께, 이젤 앞에 앉아 있던 수십 명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에게로 쏠렸다. 웅성거리던 소리가 거짓말처럼 뚝 끊기고, 오직 연필 끝이 캔버스를 긁는 건조한 소리만이 유령처럼 울려 퍼졌다.
“어……? 한소아?”
“야, 쟤 한소아 아니야? 자살기도하고 병원에 실려 갔다더니 진짜 살아 돌아온 거야?”
나지막한 속삭임들이 화살처럼 꽂혔다. 소윤은 그 시선들을 정면으로 받아내며 한 걸음씩 걸어 나갔다. 거울 속에서 수천 번을 연습했던 언니 한소아의 걸음걸이. 어깨를 살짝 움츠리고, 시선은 바닥에서 15도 위를 향하며, 극도로 섬세하고 유약해 보이는 태도. 오른쪽 눈 밑에 정교하게 찍어 넣은 미세한 눈물점까지, 지금 이곳에 서 있는 존재는 영락없는 천재 화가 ‘한소아’였다.
하지만 소윤의 오른손목을 단단히 옥죄고 있는 두꺼운 검은색 아대 아래에는 언니의 상처가 없었다. 그곳에는 동생 한소윤이 언니의 완벽한 복제품이 되기 위해, 밤새도록 이젤 앞에서 피눈물을 흘리며 붓을 쥐다 찢어진 굳은살과 흉터들만이 숨겨져 있을 뿐이었다.
소윤은 실기실 구석, 조명이 거의 닿지 않는 어두운 자리에 자신의 낡은 미술 가방을 내려놓았다. S등급 수석이었던 언니의 자리는 이미 빼앗긴 지 오래였다. 지금 그녀에게 배정된 곳은 F등급이나 다름없는 가장 그늘진 모퉁이였다. 실기실 저편, 채광이 가장 좋은 창가 자리에서는 이사장 아들이자 가짜 천재인 이준서가 고가의 맞춤형 이젤 앞에 앉아 소윤을 비웃듯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서혜영 교수의 친척 조카이자 아르케의 행동대장인 서지민이 팔짱을 낀 채 소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듯 노려보고 있었다.
소윤이 이젤을 조절하려던 순간, 등 뒤에서 거친 발소리가 들려왔다.
쾅!
“야, 한소아. 오랜만이다?”
사나운 목소리와 함께 소윤의 가방이 사정없이 걷어차였다. 가방이 뒤집히며 낡은 물감 튜브들과 연필들이 바닥으로 요란하게 흩어졌다. 발길질의 주인공은 강민재였다. 아틀리에 아르케의 말단 행동대장이자, 이사장 아들의 그늘 밑에서 약자들을 짓밟으며 쾌감을 느끼는 은성예고 미술과의 권력자.
민재는 흩어진 물감들을 구두 굽으로 짓밟으며 소윤의 얼굴 앞으로 상체를 들이밀었다.
“죽다 살아나니까 눈에 뵈는 게 없냐? 인사도 없이 제자리를 찾아가네? 예전처럼 기어봐, 어? 그럼 물감 정도는 주워줄 테니까.”
실기실 내부의 온도가 순식간에 영하로 떨어졌다. 주변의 학생들은 숨을 죽인 채 이 잔인한 유희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과거의 한소아라면 이 상황에서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숙였을 것이다. 민재는 당연히 그런 반응을 기대하며 비열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소윤의 내면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여기서 울거나 피하면 한소아다. 하지만 나는 소아가 아니다. 나는 가짜다. 너희를 파멸시키기 위해 지옥에서 걸어온 유령이다.’
소윤은 심장 박동수를 강제로 제어했다. 뇌 속에서 아드레날린이 솟구치는 것을 차갑게 억누르고, 민재의 얼굴 골격을 정밀하게 분석했다. 그의 턱 근육의 떨림, 흥분으로 인해 미세하게 확장된 동공. 소윤은 언니의 유약한 눈빛 대신, 깊이를 알 수 없는 서늘하고 무표정한 눈빛으로 민재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그 기괴할 정도의 침착함에 민재의 얼굴에서 미소가 서서히 굳어졌다.
“이게…… 왜 이렇게 꼴아봐?”
그때, 서지민이 천천히 다가왔다. 그녀는 소윤의 오른손목에 감긴 두꺼운 아대를 빤히 쳐다보며 비아냥거렸다.
“손목 아대는 왜 찬 거야? 자살 기도 흔적이라도 가리려고 하는 건가? 아니면, 소묘 선이 예전 같지 않아서 미리 밑밥 까는 거야? 서 교수님이 네 재능이 돌아왔는지 엄청 궁금해하시던데.”
지민의 날카로운 질문은 소윤의 정체를 꿰뚫으려는 현미경과 같았다. 조금이라도 당황하거나 태도가 흔들린다면 그 즉시 위장은 깨질 터였다.
소윤은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바닥에 흩어진 물감들 사이에서 언니가 생전 가장 아끼던, 붓끝이 한쪽으로 닳아 있는 ‘낡은 붉은 돼지털 붓’을 조용히 집어 들었다. 거친 돼지털의 질감이 손가락 마디 사이에 감겨왔다. 소윤은 붓을 쥔 손에 힘을 빼고, 언니의 목소리 톤을 완벽히 복제하여 속삭이듯 차갑게 맞받아쳤음.
“오랜만이야, 지민아.”
그 목소리는 부드러웠으나, 뼛속까지 시린 냉기를 머금고 있었다. 소윤은 붓끝으로 지민의 구두 끝을 가볍게 툭 치며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남의 캔버스보다 남의 손목에 관심이 많네. 네 그림 구도나 신경 쓰는 게 좋을 텐데. 지난 실기 평가 때 좌우 비례가 완전히 무너졌던데, 서 교수님이 삼촌이라 그냥 넘어가 주신 건가?”
“뭐, 뭐라고?”
지민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게 달아올랐다. 주변에서 낮게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에 지민은 이성을 잃고 소윤의 멱살을 잡으려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강민재가 기세를 잃지 않으려 소윤의 S등급 이젤을 발로 차며 도발했다.
쾅! 이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흔들렸고, 실기실 내부의 모든 시선이 소윤에게 집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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