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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메랄드 빌라의 균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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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에메랄드 빌라의 무거운 대리석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는 언제나 단두대의 칼날이 떨어지는 소리처럼 들렸다.


서울 한남동 라피스 갤러리에서 윤설아와의 아슬아슬한 계약 동맹을 맺고 돌아온 밤, 강태성은 온몸을 짓누르는 피로감 속에서도 결코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셔츠 안쪽, 기숙사 탈의실에서 남궁철에게 부딪혔던 왼쪽 어깨뼈 부근이 욱신거리며 날카로운 통증을 뱉어냈다. 하지만 지금 태성에게는 육체적인 고통 따위를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내일 아침이면 아너스 국제학교의 정기 신체검사가 시작된다. 서태진 부회장이 파놓은 유전자 검사라는 거대한 덫이 그의 목줄을 죄어오고 있었다.


태성은 2층 침실로 올라가 문을 걸어 잠갔다. 그리고 무도수 금테 안경을 벗어 화장대 위에 내려놓은 뒤, 곧바로 드레스룸 안쪽의 옷장으로 향했다. 옷장 가장 깊숙한 곳, 수트 안감 사이의 미세한 틈새로 손을 뻗었다.


그 순간, 태성의 손가락 끝이 허공에서 멈췄다.


틈새 사이에 걸어두었던, 육안으로는 거의 보이지 않는 얇은 검은색 머리카락 한 올이 끊어져 있었다.


머릿속에서 경보음이 요란하게 울렸다. 누군가 이 옷장을 열고 안쪽의 비밀 공간을 뒤졌다. 태성은 떨리는 손으로 틈새 안쪽에 숨겨두었던 낡은 가죽 지갑을 더듬었다.


없었다.


가난했던 슬럼가 시절, 자신의 진짜 주민등록증과 병상에 누워 있는 친어머니 이신혜의 유일한 사진을 담아두었던 낡은 지갑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들켰다.’


심장이 갈비뼈를 뚫고 나올 것처럼 요동치기 시작했다. 극단적인 공포가 척추를 타고 뇌리로 치솟았다. 이 빌라 내부에서 태성의 방을 뒤질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자는 단 두 명뿐이었다. 수석 집사인 오 집사, 혹은 방 청소를 담당하는 가사 도우미 이 메이드.


태성은 반사적으로 주머니 속의 암호화된 투폰을 꺼내려다 멈췄다. 지금 전산적인 해킹을 돌릴 시간이 없었다. 발각된 물증이 오 집사의 손을 거쳐 서울의 서태진 부회장에게 전송되는 순간, 태성과 그의 어머니 이신혜의 목숨은 그날로 끝이었다.


태성은 문에 귀를 대고 바깥의 소리에 극도로 집중했다. 빌라 내부의 무거운 정적 속에서, 아주 미세한 바스락거림과 나직한 말소리가 2층 복도 구석의 세탁실 방향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태성은 소리 없이 방문을 열고 어둠이 내려앉은 복도로 나섰다.


세탁실 문틈 사이로 새어 나오는 희미한 전등 불빛 아래, 가사 도우미 이 메이드가 서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태성의 낡은 가죽 지갑이 들려 있었고, 다른 한 손에는 스마트폰이 쥐어져 있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화면을 누르고 있었다. 단축 번호 1번. 이 빌라의 총관리자이자 감시자인 오 집사의 번호였다.


“아, 오 집사님…… 저기, 서 도련님 방에서 아주 이상한 물건을 찾았는데…….”


이 메이드의 떨리는 목소리가 문틈을 넘어 태성의 귀에 박혔다.


태성은 ‘극단적 마인드 컨트롤 및 심박 제어’를 가동했다. 아드레날린의 폭발적인 분비를 억제하며 차가운 이성을 강제로 끌어올렸다. 지금 이 순간, 단 1초의 지체도 허용되지 않았다.


태성은 바람처럼 소리 없이 복도를 질주했다.


하지만 급박한 움직임 속에서, 그의 발끝이 복도 장식대 위에 놓여 있던 청자 화병의 하단을 미세하게 스쳤다.


찌르르.


화병이 대리석 바닥 위에서 미세하게 긁히는 날카로운 마찰음이 고요한 빌라 전체를 울렸다.


그 미세한 소음은 치명적인 연쇄 반응을 일으켰다. 빌라 마당 건너편 별채의 불빛이 찰나의 순간 켜졌다. 오 집사의 사택 출입 패턴을 기억하고 있던 태성의 머릿속에 최악의 시나리오가 그려졌다. 오 집사가 별채 문을 열고 본채로 향하는 발소리가 저 멀리 정원 자갈밭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누구세요?”


소리에 놀란 이 메이드가 고개를 돌리는 순간, 태성은 이미 세탁실 안쪽으로 침투해 있었다.


스윽!


태성은 가차 없이 손을 뻗어 이 메이드의 손에 쥐여 있던 스마트폰을 낚아챘다. 그리고 화면을 쓸어내려 오 집사에게 연결되려던 통화 버튼을 강제로 끊어버렸다.


“읍……! 읍!”


이 메이드가 비명을 지르려 하자, 태성은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입을 거칠게 틀어막았다. 비명이 세탁실의 타일 벽에 부딪혀 먹먹하게 묻혔다. 태성은 그녀의 유약한 몸을 세탁기 옆 벽면으로 거칠게 밀어붙였다.


쾅.


나직한 충격음과 함께 이 메이드의 눈동자가 공포로 거대하게 확장되었다. 안경을 벗은 태성의 맨눈이 어둠 속에서 야수처럼 서늘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눈빛은 온실 속에서 자란 도련님 서지한의 것이 아니었다. 밑바닥 슬럼가에서 짓밟히며 자라난 진짜 포식자, 강태성 본연의 안광이었다.


“조용히 해. 소리 지르면 아주머니 아들부터 죽어.”


태성의 목소리는 낮고 차가웠으며,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이 메이드의 신체가 경직되는 것이 손끝을 통해 고스란히 전해졌다. 태성은 서서히 손을 떼었지만, 그녀의 턱 끝을 강하게 움켜쥐며 벽에 고정시켰다.


“이 씨 아주머니. ‘약점 기반 마이크로 가스라이팅’이라고 들어봤어? 아주머니 아들 이민우, 제주 드림타워 사설 도박판에서 진 빚이 정확히 8천 4백만 원이더군. 다음 주까지 못 갚으면 신체 포기 각서가 집행돼서 원양어선에 팔려 가기로 내정되어 있지.”


이 메이드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자신의 가장 치명적인 가정사를 이 오만한 도련님이 어떻게 알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흥신소 백 실장을 통해 빌라 내부 직원들의 신상 명세를 샅샅이 털어두었던 태성의 철저한 사전 준비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어떻게…… 도련님이 그걸…….”


“내가 모르는 건 없어, 아주머니.”


태성은 주머니에서 두툼한 백색 봉투를 꺼내 이 메이드의 시선 바로 앞에 흔들어 보였다. 봉투의 벌어진 틈새 사이로 1억 원짜리 은행 수표와 빳빳한 신권 현금 뭉치가 비쳐 보였다. 한미정의 비밀 활동비에서 은밀히 인출해 둔 태성의 비상 자금이었다.


“선택해. 오 집사에게 그 지갑을 넘기고 나를 고발해서, 서태진 부회장에게 고작 몇백만 원의 포상금을 받고 아주머니 아들의 장기가 적출되는 걸 지켜볼 텐가?”


태성은 봉투를 이 메이드의 앞치마 주머니 속으로 깊숙이 찔러 넣었다.


“아니면, 이 돈으로 아들의 사채 빚을 당장 청산하고, 앞으로 내 방에서 나오는 그 어떤 물건도 본 적이 없다고 오 집사에게 거짓 보고를 올릴 텐가? 아주머니 아들의 목숨값은 오직 아주머니의 혓바닥 끝에 달려 있어.”


공포와 구원. 태성이 던진 이중의 칼날이 이 메이드의 영혼을 완벽하게 해체해 나갔다. 그녀의 눈에서 절망적인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순간, 1층 현관문이 열리는 둔탁한 소리가 빌라 내부에 울려 퍼졌다.


타닥, 타닥.


오 집사의 정돈된 구두 굽 소리가 계단을 타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시간이 없었다.


태성은 이 메이드의 턱을 쥔 손에 힘을 주며 그녀의 눈동자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대답해. 아들을 살릴 건가, 아니면 같이 죽을 건가.”


이 메이드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태성의 옷소매를 잡으며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살…… 살려주세요, 도련님. 시키는 대로 할게요. 제발 아들만은…….”


완벽한 포섭이었다. 태성은 이 메이드의 손에서 진짜 주민등록증이 든 가죽 지갑을 회수해 자신의 품속 깊숙이 쑤셔 넣었다. 그리고 그녀의 스마트폰을 돌려주며 차갑게 속삭였다.


“가서 오 집사를 막아.”


이 메이드는 눈물을 닦고 세탁실 문을 열고 나섰다. 태성은 세탁실 안쪽의 음영 속으로 몸을 숨겼다. 복도 저편에서 오 집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씨? 이 밤중에 복도에서 무슨 소리가 난 것 같습니다만. 도련님 방은 확인해 보았습니까?”


“아, 오 집사님……!”


이 메이드의 목소리는 여전히 떨렸지만, 아들의 목숨이 걸린 절박함이 그녀에게 초인적인 연기력을 부여하고 있었다.


“그게 아니라…… 제가 청소 도구를 정리하다가 그만 복도 청자 화병을 건드려서요. 도련님 방은 이미 청소를 끝내고 나왔는데, 도련님께서는 피곤하시다며 불을 끄고 일찍 잠자리에 드셨습니다.”


오 집사의 발걸음이 2층 복도 한가운데서 멈췄다. 은테 안경 너머로 세탁실과 태성의 닫힌 침실 문을 번갈아 훑어보는 그의 차가운 시선이 어둠 속에서도 느껴질 듯했다.


몇 초간의 숨 막히는 정적이 흐른 뒤, 오 집사의 나직한 목소리가 복도를 때렸다.


“그렇습니까. 밤이 깊었으니 이만 퇴근하시지요. 내일 아침 신체검사 일정이 있으니 도련님의 수면을 방해해서는 안 됩니다.”


“네, 집사님. 안녕히 주무세요.”


구두 소리가 서서히 계단 아래로 멀어지고, 현관문이 다시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태성은 세탁실 벽에 등을 기대고 주르륵 주저앉았다. 손끝이 얼음장처럼 차갑게 식어 있었다. 이 메이드를 공범으로 포섭해 에메랄드 빌라 내부의 첫 번째 방어벽을 구축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안도의 한숨을 내쉴 시간은 없었다.


징.


품속에 있던 암호화된 투폰이 미세하게 진동했다. 한도현으로부터 도착한 극비 위성 메시지였다.


[도현: 보건실 내부 전산망 우회 해킹 경로 개설 완료. 샘플 보관함의 이중 도어 잠금장치를 강제로 풀 수 있는 마스터 코드 빌드 완료함. 이제 남은 건 형이 내일 아침 오 집사의 감시를 뚫고 진짜 서지한의 피를 보건실로 반입하는 것뿐이야.]


태성은 투폰 화면의 푸른 빛을 응시하며 파손된 안경 조각을 만지작거렸다. 내일 아침, 아너스 국제학교 보건실에서 인생을 건 단 한 번의 유전자 바꿔치기 도박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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