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위험한 약혹녀
서울 한남동의 나지막한 언덕배기에 위치한 대영그룹 소유의 프라이빗 갤러리 ‘라피스’.
유리 통창 너머로 한강의 야경이 보석처럼 흩어지는 그곳은 대한민국 최상류층의 사교계 중에서도 가장 폐쇄적이고 화려한 무대였다. 수억 원을 호가하는 현대 미술품들 사이로 은은한 재즈 선율이 흘렀고, 최고급 샴페인 잔이 부딪치는 맑은 금속성이 공간을 채웠다.
나는 무도수 금테 안경을 가볍게 밀어 올리며 갤러리 메인 홀로 걸어 들어갔다.
완벽하게 재단된 아너스 국제학교의 포멀 수트 스타일 교복. 왼쪽 손목에는 진짜 서지한의 파텍필립 한정판 시계가 묵직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겉보기에는 오만하고 기품 넘치는 재벌가의 후계자였지만, 내 셔츠 안쪽의 어깨뼈 부근은 기숙사 락커룸에서 남궁철에게 부딪친 타박상으로 인해 욱신거리는 통증을 뱉어내고 있었다.
‘통증 반응 인위적 억제 기술’을 가동해 얼굴의 미세한 안면 근육을 통제했다. 통증은 뇌에서 지워졌지만, 내 신경은 여전히 팽팽하게 곤두서 있었다.
서민준의 기습을 막아내자마자 날아든 대영그룹의 프라이빗 파티 초대장. 그리고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진짜 서지한의 정략 약혼녀, 윤설아.
“지한 씨. 오랜만이에요.”
갤러리 안쪽, 일반 하객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프라이빗 VIP 룸의 문이 열리며 익숙하고도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윤설아였다.
조각처럼 완벽하게 빚어진 이목구비, 길게 늘어뜨린 흑발, 그리고 범접할 수 없는 서늘한 아우라를 풍기는 대영그룹의 외동딸. 그녀는 짙은 네이비 빛깔의 실크 드레스를 입은 채 대리석 테이블 너머에서 나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의 눈빛은 마치 먹잇감의 숨통을 어디로 끊을지 고민하는 야수처럼 예리하게 빛났다.
“오랜만이군, 설아.”
나는 안나 장에게 혹독하게 교정받은 서지한 특유의 거만하고 나른한 발성으로 대답했다. 소파에 깊숙이 몸을 묻으며 다리를 꼬았다. 오만한 태도로 주도권을 쥐려는 철저히 계산된 행동이었다.
윤설아는 내 거만한 태도에도 흔들림 없이, 테이블 위에 놓인 조그만 리본이 달린 수제 초콜릿 상자를 가볍게 밀어 내 앞으로 보냈다.
“지한 씨를 위해 특별히 준비했어요. 벨기에에서 공수해 온 수제 프랄린 초콜릿이에요. 지한 씨가 예전부터 유독 좋아하던…… 땅콩 크림이 아주 듬뿍 들어간 걸로만 골랐죠.”
그녀의 고혹적인 입술이 호선을 그리며 매끄럽게 올라갔다.
순간, 내 머릿속에서 경보음이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땅콩 크림.’
내 안의 ‘미세 표정 실시간 추적 기술’이 즉각 윤설아의 얼굴을 스캔했다. 그녀의 눈동자가 좌우로 미세하게 움직이고 있었고, 찻잔을 쥔 손가락 끝에 아주 가벼운 힘이 들어간 것이 포착되었다. 무의식적인 긴장 상태.
뇌리에 서지한의 비밀 일기장 속 한 구절이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
[서지한은 선천적으로 극심한 땅콩 알레르기가 있다. 초등학교 시절, 땅콩 가루가 섞인 과자를 먹고 아나필락시스 쇼크로 중환자실에서 사흘 동안 인공호흡기에 의지해 목숨을 연명했다. 가문 내부에서 이 알레르기는 서지한의 가장 취약한 신체적 약점으로 분류되어 철저히 대외비로 부쳐졌다.]
심장이 갈비뼈를 때리며 심박수가 순식간에 140 이상으로 폭증하려 했다. 손끝이 차갑게 식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덫이다. 이 여자는 지금 내가 서지한이 맞는지 내 목숨을 걸고 시험하고 있는 거다.’
만약 내가 이 초콜릿을 의심 없이 받아먹는다면, 알레르기 반응이 오지 않는 순간 내 정체는 즉시 가짜임이 탄로 날 터였다. 반대로 땅콩 알레르기가 있다며 거부하더라도, 그 거부하는 태도에서 미세한 동요를 들킨다면 윤설아 같은 영리한 인간은 단번에 눈치챌 것이 분명했다.
나는 ‘극단적 마인드 컨트롤 및 심박 제어’를 최대치로 가동했다. 아드레날린의 분비를 억제하며 쿵쾅거리는 심장을 강제로 60대의 평온한 템포로 가라앉혔다. 차가운 이성이 머릿속을 채웠다.
“설아 씨.”
나는 초콜릿 상자를 가볍게 훑어본 뒤, 손가락 끝으로 상자 뚜껑을 툭 쳐서 닫아버렸다.
“나를 죽이고 싶어서 환장한 모양이군.”
내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눈빛에는 살기가 서려 있었다. 진짜 서지한이 자신의 목숨을 위협받았을 때 부렸을 법한 오만하고 잔혹한 히스테리를 완벽하게 빙의해 연기한 것이었다.
윤설아의 눈동자가 아주 미세하게 좁혀졌다. 그녀는 찻잔을 천천히 내려놓으며 차분하게 대꾸했다.
“죽이다니요, 지한 씨. 좋아하는 선물을 준비했을 뿐인데 과민반응이 심하네요.”
“과민반응?”
나는 코웃음을 치며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내가 땅콩 근처만 가도 숨이 막혀 죽는다는 걸 가장 잘 아는 약혼녀가, 일부러 땅콩 크림이 가득 찬 초콜릿을 내민다? 서태진 부회장 밑으로 들어가서 첩자 노릇이라도 하기로 한 건가? 아니면 대영그룹이 드디어 한성 가문과 전쟁이라도 선포하고 싶은 건가?”
내 서늘한 다그침에 윤설아는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녀의 눈빛은 깊고 어두워 그 속내를 쉽게 가늠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이내, 그녀는 나직하게 한숨을 쉬며 테이블 아래에서 가죽 다이어리 한 권을 꺼내 내 앞에 툭 던졌다.
“연기는 그쯤 해두죠.”
윤설아의 목소리에서 가식적인 부드러움이 완전히 걷혀 나갔다. 오직 냉혹한 실리주의자로서의 본질만이 남은 차가운 목소리였다.
“서지한 씨의 알레르기 반응? 그래요, 진짜 서지한이라면 방금처럼 미친 듯이 화를 냈겠죠. 하지만 당신이 화를 내는 타이밍은 너무 완벽해서 오히려 연출된 것처럼 정교해요.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가 다이어리를 펼쳐 내 눈앞에 제시했다. 그 안에는 두 장의 문서가 나란히 붙어 있었다.
한 장은 과거 서지한이 작성했던 친필 서명 문서였고, 다른 한 장은 내가 최근 아너스 국제학교 복학 신청서와 세미나 과제물에 작성한 필적이었다. 자를 대고 그은 듯 정밀하게 분석된 붉은 선들이 두 필적의 미세한 획 굵기와 자음의 꺾임 각도 불일치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런던에서 머리를 다치고 돌아온 이후로 지한 씨의 필적은 획을 긋는 압력과 자음의 각도가 미세하게 변했어요. 게다가 당신이 학교 복도를 걸어갈 때의 골반 각도와 발걸음 프레임을 고해상도로 분석해 봤는데, 과거의 서지한과 걷는 템포가 0.12초 차이 나더군요.”
윤설아는 다이어리를 덮으며 차갑게 미소를 지었다.
“뇌 손상으로 지능이 폭증했다는 그럴듯한 핑계는 대영그룹의 분석팀 앞에서는 통하지 않아요. 필적은 모사할 수 있어도, 무의식중에 나오는 신체적 프레임과 논리 구조까지 완벽히 복제할 수는 없으니까.”
그녀의 손가락이 테이블 위를 가볍게 톡, 톡 두드렸다. 그 소리는 마치 내 사형 집행을 알리는 초침 소리처럼 들렸다.
“진짜 서지한은 지금 어디 있죠? 그리고…… 내 눈앞에 서서 서지한의 가면을 쓰고 있는 당신, 진짜 정체가 뭐야?”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사방이 꽉 막힌 밀실에서, 상대는 내 정체를 입증할 수 있는 정교한 전산 및 물리적 물증을 이미 쥐고 있었다. 여기서 구차하게 부인하거나 서지한의 히스테리를 계속 연기하는 것은 오히려 윤설아에게 내 나약함을 증명하는 꼴밖에 되지 않았다.
나는 침묵을 지켰다. 머릿속의 계산기가 미친 듯이 돌아갔다.
‘윤설아. 대영그룹의 외동딸. 하지만 진짜 일기장과 흥신소 백 실장의 보고서에 따르면, 그녀는 계모와 이복 남동생에게 밀려 가문 내 승계 구도에서 완벽하게 배제될 위기에 처해 있다. 그녀가 나를 당장 경찰이나 서태진에게 고발하지 않고, 이 프라이빗 밀실로 따로 불러 단둘이 대면하고 있는 진짜 이유가 무엇인가.’
답은 명확했다. 그녀 역시 벼랑 끝에 몰려 있었고, 나라는 존재가 필요했던 것이다.
나는 천천히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내 얼굴을 가리고 있던 무도수 금테 안경을 벗어 테이블 위에 가볍게 내려놓았다.
스윽.
안경이 벗겨지자, 그동안 오만한 재벌가 서자의 가면 뒤에 숨겨져 있던 가난한 강태성 본연의 날카롭고 지적인 안광이 드러났다. 내 눈빛에는 더 이상 서지한 특유의 나약한 광기나 허세는 없었다. 밑바닥 슬럼가에서 다져진 처절한 생존 본능과 냉철한 이성만이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태도의 급격한 변화에 윤설아의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크게 흔들렸다.
“과연 명색이 대영그룹의 유일한 적통 상속녀답군. 예리해.”
나는 안경을 벗은 맨눈으로 윤설아의 아름답고 차가운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했다. 내 목소리는 중저음의 깊고 차분한 톤으로 변해 있었다.
“맞아. 나는 진짜 서지한이 아니야. 그 오만방자한 도련님은 지금 스위스 요양원에서 산소호흡기에 의지해 숨만 쉬고 있는 시체나 다름없는 상태지. 내가 그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여기 서 있는 가짜야.”
윤설아는 내 거침없는 자백에 숨을 멈췄다. 그녀는 내 눈빛에서 풍기는 압도적인 이성과 기세에 본능적인 경계심을 품으며 상체를 뒤로 살짝 뺐다.
“가짜 주제에 제법 당당하군요. 내가 지금 당장 서태진 부회장이나 경찰에 이 사실을 고발하면, 당신과 당신을 고용한 한미정은 사기죄와 신분 위조로 인생이 끝난다는 걸 모르는 건가요?”
“고발해.”
나는 어깨를 가볍게 으쓱하며 조소했다.
“지금 당장 이 방 문을 열고 나가서 내 정체를 폭로해 봐, 윤설아 씨. 하지만 그렇게 해서 당신이 얻는 실질적인 이득이 뭐지?”
나는 테이블 위에 놓인 땅콩 초콜릿 하나를 집어 들고 손가락 사이로 굴렸다.
“내가 무너지면 한성그룹의 경영권은 고스란히 서태진 부회장의 손아귀로 넘어가겠지. 그리고 한성과 대영의 합병 계약은 파기될 거고, 당신은 가문 내에서 당신을 호시탐탐 몰아내려 드는 계모와 이복 남동생의 압박 속에서 완벽하게 고립될 거야.”
윤설아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그녀의 미세 표정 근육이 극도로 경직되는 것이 내 시야에 똑똑히 포착되었다. 나는 그녀의 가장 아픈 급소를 정확하게 찌른 것이었다.
“당신 계모가 아너스 국제학교 이사회에 압력을 넣어 당신의 평판 점수를 깎아내리고, 남동생에게 대영의 핵심 지분을 몰아주려는 움직임을 모를 줄 알았나? 당신은 지금 가문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비호해 줄 강력한 한성그룹의 약혼자가 절실하게 필요한 상태야.”
나는 초콜릿을 가볍게 테이블 위에 탁 내려놓았다.
“서태진 부회장의 꼭두각시가 된 한성그룹과 손을 잡고 계모 밑에서 평생 숨죽이며 살 텐가? 아니면……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실력을 가진 나와 손을 잡고 대영과 한성 모두를 손에 넣을 텐가?”
나는 그녀의 눈빛 속 깊은 곳에 도사린 야망과 결핍을 후벼 파며, 내 최종 제안을 던졌다.
“나와 계약 약혼을 맺읍시다, 윤설아 씨. 내가 한성그룹을 완벽하게 장악하고, 당신의 가장 단단한 날개가 되어줄 테니까. 당신은 대외적으로 내 약혼녀로서 내 가짜 신분의 방패막이가 되어주기만 하면 돼.”
침묵이 VIP 룸을 무겁게 지배했다.
은은한 조명 아래, 윤설아는 내 얼굴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안경을 벗은 내 맨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가짜라고는 믿을 수 없는 압도적인 지배자의 그릇과 천재성에 그녀는 전율하고 있었다.
그녀의 붉은 입술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그 철벽 같던 대영그룹의 여왕의 마음에, 마침내 돌이킬 수 없는 거대한 균열이 생겨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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