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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의실의 칼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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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기 찬 공기가 폐부를 무겁게 짓눌렀다. 체육 수업이 끝난 직후의 아너스 기숙사 골드동 락커룸은 기이할 정도로 고요했다. 다른 학생들이 모두 빠져나간 공간에는 오직 차가운 대리석 바닥을 울리는 미세한 발소리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사락.


나는 무도수 금테 안경을 고쳐 쓰며 락커 앞에 섰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완벽한 한성그룹의 서자, 서지한이었다. 단정하게 정돈된 흑발과 오만하게 치켜올라간 눈매, 그리고 왼쪽 손목에서 은은하게 빛나는 한정판 파텍필립 손목시계까지. 어제 골드 링 비밀 세미나실에서 서민준과 임태오를 금융적으로 완벽하게 파멸시키고 얻어낸 ‘체어맨’의 아우라가 내 전신을 감싸고 있었다.


하지만 가슴속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신경안정제 디아제팜의 쓴맛이 맴돌았다. 방금 전 세미나실에서 서민준이 내 어깨를 노려보던 그 광기 어린 집착. 놈은 자신이 파산했다는 사실보다, 내가 진짜 서지한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에 명줄을 걸고 있었다. 진짜 서지한의 왼쪽 어깨에는 과거 맹수 사냥 중 입은 깊은 갈고리 모양의 흉터가 있었지만, 빈민가 출신인 나에게는 그런 귀족적인 흉터 따윈 없었으니까.


스윽.


나는 체육복 단추를 풀기 위해 손을 뻗었다. 매일 아침 샤워실에서 40분 동안 정교하게 도포한 ‘흉터 은폐용 특수 분장 키트’의 실리콘 감촉이 어깨 피부 위로 이물감 있게 느껴졌다. 락커룸 신체 노출 금지 규칙에 따라 철저히 개인 칸막이 안에서만 옷을 갈아입어야 했다. 만약 단 한 번이라도 이 가짜 실리콘 흉터의 가장자리가 들통나는 날에는, 내 모든 신분 위장극은 그 자리에서 즉사였다.


딸깍.


그때, 락커룸 입구의 육중한 철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뒤이어 들려온 소리는 내 척추를 타고 서늘한 긴장감을 흘려보냈다.


철컥. 덜컥.


문이 안에서 잠기는 소리였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락커룸의 어두운 음영 속에서 두 개의 실루엣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서민준의 오른팔이자 오라클의 행동대장인 채유진, 그리고 그의 등 뒤를 호위하듯 서 있는 거구의 유도 특기생 남궁철이었다.


채유진은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손에 스마트폰 카메라를 쥐고 있었고, 체육복 상의를 풀어헤친 남궁철은 두꺼운 목덜미를 가볍게 풀며 내 앞길을 막아섰다.


“서지한 도련님. 오늘따라 유난히 결벽증이 심하시네. 왜 매번 구석 칸막이에서만 옷을 갈아입으실까?”


채유진이 껌을 씹으며 깐죽거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의 날카로운 눈매가 내 왼쪽 어깨를 집요하게 훑어내렸다.


“비켜라. 천박한 것들이 내뿜는 땀 냄새에 머리가 아프니까.”


나는 안나 장에게 혹독하게 배운 대로, 하 턱을 살짝 들어 올리며 오만한 중저음으로 받아쳤다. 내 안의 ‘미세 표정 실시간 추적 기술’이 즉각 가동되었다. 채유진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실룩거렸고, 남궁철의 호흡은 가쁘고 거칠었다. 긴장하고 있는 것은 놈들도 마찬가지였다. 이 습격은 서민준의 사주를 받은 벼랑 끝의 도발이었다.


“말은 여전히 번지르르하네.”


채유진이 턱짓으로 남궁철에게 신호를 보냈다.


“민준이가 그러더군. 영국 유학 가기 전에 네 왼쪽 어깨에 있던 그 멋진 사냥 흉터가, 복학한 이후로는 한 번도 보이지 않는다고. 진짜 서지한이라면 그 영광스러운 상처를 숨길 이유가 없잖아? 설마…… 그 상처를 보여주지 못할 진짜 ‘치명적인 이유’라도 있는 건가?”


순식간에 남궁철이 내 시야를 가로막으며 다가왔다. 압도적인 피지컬의 거구가 뿜어내는 물리적 위압감이 락커룸을 가득 채웠다.


‘싸우면 안 된다.’


내 뇌리가 냉정하게 상황을 분석했다. 아너스의 학칙상 물리적 폭력은 동반 징계이자 즉각적인 평판 강등 사유였다. 내가 주먹을 쥐는 순간, 서민준이 파놓은 이사회 징계의 덫에 걸려들게 된다. 나는 철저히 피해자이자 합법적인 지배자의 위치를 고수해야 했다.


“남궁철. 비켜라. 세 번 말하지 않는다.”


“도련님, 잔말 말고 어깨 좀 봅시다!”


남궁철이 포효하듯 외치며 내 멱살을 움켜쥐었다. 억센 손아귀가 내 목덜미를 짓눌렀고, 그 강력한 힘에 밀려 내 몸이 뒤쪽 철제 락커로 사정없이 밀려났다.


쾅!


등 뒤의 락커가 찌그러지는 굉음과 함께 날카로운 통증이 척추를 타고 뇌리로 솟구쳤. 나는 반사적으로 ‘통증 반응 인위적 억제 기술’을 가동했다. 뇌의 아드레날린 분비를 강제로 유도하며 심박수를 강제로 낮췄다. 고통은 차가운 이성에 의해 마비되었지만, 진짜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락커 모서리에 왼쪽 어깨가 강하게 부딪치는 순간, 찌르르한 감각과 함께 피부 위에 얹어둔 실리콘 가짜 흉터의 가장자리가 미세하게 들뜨는 느낌이 전해진 것이다.


‘찢어졌나?’


식은땀이 이마를 타고 흘러내렸다. 만약 남궁철이 이대로 내 상의를 찢어발겨 들뜬 실리콘 조각을 채유진의 카메라 앞에 노출시킨다면, 내 모든 삶은 여기서 끝이었다.


“철아, 잡아두고 상의 찢어! 내가 바로 근접 촬영할 테니까!”


채유진이 카메라 렌즈를 내 어깨로 조준하며 소리쳤다. 남궁철의 굵은 손가락이 내 체육복 깃을 움켜쥐고 아래로 강하게 잡아당겼다.


찌이이익!


날카로운 마찰음과 함께 내 체육복 상의의 왼쪽 어깨 옷자락이 처참하게 찢겨 나갔다.


그 반동으로 락커룸의 차가운 형광등 불빛 아래, 내 맨살이 날것 그대로 노출되었다. 거울 뒤로 비친 내 왼쪽 어깨에는 붉고 선명한 갈고리 모양의 사냥 상처 자국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아침에 공들여 붙여둔 특수 실리콘 흉터였다.


“어? 상처가…… 있잖아?”


채유진의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크게 흔들렸다. 놈은 흉터가 없을 것이라 확신하고 카메라를 들이밀었으나, 눈앞에 나타난 선명한 붉은 자국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안심할 수 없었다. 충격으로 인해 실리콘 가장자리의 얇은 막이 아주 미세하게 찢어져 덜렁거리고 있었다. 채유진이 한 걸음만 더 다가와 손가락으로 그 상처를 만져보거나 초고해상도로 촬영한다면 가짜 피부임이 탄로 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나는 떨리는 호흡을 억누르며, 왼쪽 손목에 찬 파텍필립 시계를 차가운 미소와 함께 가볍게 흔들었다. 그리고 시계 측면의 보이지 않는 미세한 돌기를 손톱 끝으로 꾹 눌렀다.


딸깍.


한도현이 개조해 둔 초소형 무지향성 고성능 녹음 기능이 가동되기 시작했다.


“채유진. 그리고 남궁철.”


나는 안경 너머로 서늘한 안광을 번뜩이며 두 사람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목소리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오만한 지배자의 격조가 서려 있었다.


“너희가 지금 저지른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는 있는 건가?”


“뭐, 뭐라고?”


“락커룸 신체 노출 금지 규칙 위반, 공동 주거 침입 및 감금, 그리고 특수 폭행에 의한 신체 상해.”


나는 찢어진 옷자락 사이로 드러난 가짜 흉터를 당당하게 드러낸 채,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남궁철은 내 기세에 눌려 움켜쥐고 있던 내 멱살을 자신도 모르게 슬그머니 놓아버렸다.


“이 시계 내부에는 너희가 방금 나를 감금하고, 옷을 강제로 찢어발기며 협박한 모든 음성과 상황이 군용 등급으로 녹음되었다.”


나는 왼쪽 손목의 파텍필립 시계를 그들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내가 이 녹음 파일을 아너스 징계위원회와 본사 법률팀, 그리고 너희 부모들의 기업 감사실로 전송하는 즉시…… 너희 가문은 한성그룹과의 모든 비즈니스 라인에서 영구 제명될 거다. 서민준의 파산에 이어 너희 집안까지 길거리로 나앉고 싶다면, 어디 한 걸음만 더 다가와 보지 그래?”


채유진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려갔다. 놈의 스마트폰을 쥔 손이 눈에 띄게 부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남궁철 역시 자신의 거구에 맞지 않게 흠칫 놀라며 뒷걸음질을 쳤.


물리적인 힘은 남궁철이 압도적이었지만, 상류 사회의 법과 규율, 그리고 평판이라는 거대한 칼날 앞에서는 고작 고용된 사냥개에 불과했다. 나는 그들의 심리적 맹점을 정확하게 꿰뚫어 짓밟아버린 것이었다.


“민, 민준이가 분명히 너 흉터가 없다고…….”


채유진이 말을 더듬으며 변명하려 했다.


“서민준? 이미 가문의 차명 주식 담보까지 날려 먹고 파산한 그 패배자 놈의 말을 믿고 네 인생을 거는 건가? 참으로 눈물겨운 충성심이군.”


나는 찢어진 체육복 깃을 거만하게 정리하며 조소했다.


“당장 문 열고 꺼져라. 내 인내심이 바닥나기 전에.”


정적이 흘렀다. 채유진은 내 안경 너머의 서늘한 눈빛과 시계의 녹음 표시등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결국 공포에 질려 침을 삼켰. 놈은 황급히 뒤를 돌아 잠겨 있던 락커룸 철문의 걸쇠를 거칠게 풀었다.


철컥! 쾅!


두 사람은 도망치듯 락커룸을 빠져나갔고, 묵중한 철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공간에는 다시금 무거운 침묵만이 내려앉았다.


“하아…… 하아……”


놈들이 사라지자마자 나는 락커를 붙잡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극도로 억눌렀던 통증 반응이 한꺼번에 몰려오며 어깨뼈 부근이 욱신거렸다. 거울을 보니 가짜 실리콘 흉터의 끝부분이 완전히 찢어져 덜렁거리고 있었다. 단 1초만 늦었어도, 0.1밀리미터만 더 가까이 다가왔어도 내 정체는 완전히 까발려졌을 터였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락커룸 구석에 처박아둔 특수 분장 키트를 꺼내 다급히 수습을 시작했다.


겨우 물리적 기습은 막아냈지만, 서민준의 광기는 여기서 멈추지 않을 것이다. 놈들은 신체적 특징 검증이 실패하자, 이제 더 확실하고 과학적인 수단인 ‘DNA 유전자 검사’를 기획할 터였다.


나는 깨진 안경 조각을 밟으며 차갑게 중얼거렸다.


“서민준…… 네가 내 피를 원한다면, 기꺼이 독약을 마시게 해주지.”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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