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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추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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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송 완료 표시가 뜨는 것을 확인한 나는 노트북을 덮었다. 창밖으로 제주의 서늘한 새벽안개가 에메랄드 빌라의 정원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내일 아침, 이 안개를 뚫고 나가는 순간부터 진짜 전쟁의 시작이었다.


침대 머리맡에 놓아둔 무도수 금테 안경을 고쳐 쓰며 나는 거울을 응시했다. 거울 속에는 가난에 찌들었던 슬럼가의 소년 강태성이 없었다. 오만하게 치켜 올라간 눈매, 단정하게 정돈된 흑발, 그리고 한성그룹의 서자 ‘서지한’의 껍데기를 완벽하게 뒤집어쓴 기괴한 피조물이 서 있을 뿐이었다. 왼쪽 손목에서 째깍거리는 파텍필립 시계의 금속 감각이 내 살결을 차갑게 파고들었다. 이 시계는 진짜 서지한의 표식이자, 한도현이 개조해 둔 초소형 도청 및 녹음 장치였다.


“후우…….”


깊은 한숨을 내쉬며 심박수를 가라앉혔다. 심박수 65. 평온한 상태다. 매일 밤 안나 장의 혹독한 채찍질 아래 몸에 새긴 ‘서지한의 7대 습관 프로토콜’이 이제는 무의식의 영역까지 침투해 있었다. 하 턱을 살짝 들어 올리고, 어깨를 거만하게 뒤로 젖히는 자세가 거울 속에서 자연스럽게 완성되었다. 가면이 완전히 밀착된 것이다.


서재 문을 열고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거실 벽면 구석구석에 설치된 오 집사의 감시 카메라들이 붉은 렌즈 불빛을 깜빡이며 내 동선을 쫓았다. 창살 없는 감옥. 이곳에서 단 한 번의 습관적 실수라도 범하는 순간, 내 진짜 신분증 사본과 함께 어머니 이신혜의 병실 산소호흡기는 끊어질 터였다.


현관 앞에는 단정한 기사 유니폼을 입은 최 기사가 대기하고 있었다. 그의 모자 아래로 비치는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을 나는 포착했다. 최 기사. 오 집사에게 돈을 받고 내 동선을 보고하던 밀정이었으나, 그의 도박 빚을 약점 잡아 역으로 포섭한 나의 첫 번째 수하였다.


“도련님, 등교 차량 준비되었습니다.”


최 기사가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나는 오만한 태도로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며 리무진 뒷좌석에 몸을 실었다. 오 집사는 보이지 않았다. 별채에서 서태진 부회장에게 보낼 감시 보고서를 작성하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가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감시의 눈길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부우웅.


리무진이 에메랄드 빌라의 웅장한 철문을 벗어나 제주도의 한적한 도로로 진입한 지 채 5분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백미러를 응시하던 최 기사의 눈동자가 예리하게 굳어졌다.


“도련님, 뒤쪽에 검은색 소나타 한 대가 붙었습니다. 빌라 정문을 나설 때부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따라오고 있습니다.”


나는 안경을 손가락 끝으로 가볍게 밀어 올리며 차갑게 미소 지었다.


“송 비서군.”


오 집사의 충직한 수하이자, 내 외부 동선을 감시하는 그림자. 오 집사는 임태오가 나에게 대영 바이오라는 독이 든 성배를 건넨 직후부터 내 움직임을 완전히 봉쇄하려 들었다. 내가 한도현과 접촉하는 순간, 가짜 서지한의 전산적 알리바이가 깨질 수 있음을 본능적으로 직감한 것이리라.


“따돌려.”


나는 주머니 속에서 암호화된 투폰을 꺼내 켜며 지시했다. 이 투폰은 한도현이 군용 하드웨어 보안 칩을 이식해 만든 특수 장비로, 오 집사의 그 어떤 도청 주파수도 무력화하는 절대적인 보안선이었다.


“하지만 도련님, 상대는 오 집사의 직속 경호원입니다. 무리하게 속도를 내다가 사고라도 나면 오 집사에게 빌미를 줄 수 있습니다.”


최 기사의 목소리에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 나는 투폰 화면을 톡톡 두드리며 차가운 발성으로 그의 두려움을 짓눌렀다.


“최 기사, 네가 진 카지노 사채 빚 3억 원의 채권자가 누군지 벌써 잊었나? 내 지시를 따르지 않으면, 내일 아침 네 가족들은 길거리로 나앉게 돼. 오 집사가 무서운가, 아니면 길바닥에서 굶어 죽는 게 무서운가?”


약점 기반 마이크로 가스라이팅. 밑바닥 사채업자들에게 짓밟히며 배웠던 인간 지배의 기술이 내 입술을 통해 흘러나왔다. 최 기사는 마른침을 삼키며 운전대를 꽉 쥐었다. 그의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려갔다.


“……알겠습니다, 도련님. 꽉 잡으십시오.”


리무진의 엔진이 거친 굉음을 내지르며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뒤따라오던 검은색 소나타 역시 기다렸다는 듯 가속 페달을 밟으며 바짝 밀착해 왔다. 제주 시청 인근의 복잡한 상업 구역으로 진입하는 도로 위에서, 보이지 않는 추격전이 본격적으로 막을 올렸다.


***


제주 시청 대학로 인근은 좁은 골목길과 무질서하게 얽힌 상가들로 가득한 난장판이었다. 최고급 리무진이 지나가기에는 지나치게 협소한 공간이었지만, 최 기사의 운전 실력은 확실했다. 그는 도박에 미쳐 인생을 망치기 전, 대기업 회장의 전담 의전 기사로 일했던 베테랑이었다.


끼이익!


리무진이 이도이동의 좁은 일방통행 골목길로 기습적으로 차체를 꺾어 진입했다. 뒤따르던 송 비서의 차량이 미처 대처하지 못하고 직진 차선에서 급브레이크를 밟는 소리가 아스팔트를 찢었다.


“최 기사, 신호 대기 시간을 계산해.”


나는 투폰의 실시간 제주 교통 관제 앱을 확인하며 빠르게 지시했다.


“앞쪽 사거리 신호가 빨간불로 바뀌기 직전이다. 저 교차로를 통과하는 순간, 송 비서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져야 해.”


“예, 도련님!”


최 기사가 가속 페달을 끝까지 밟았다. 리무진이 교차로를 향해 돌진했다. 노란색 신호등이 깜빡이는 순간, 리무진의 차체가 정지선을 아슬아슬하게 통과했다.


콰아아앙!


그 순간, 골목 모퉁이에서 배달 오토바이 한 대가 튀어나왔다. 최 기사가 비명을 지르며 운전대를 왼쪽으로 급격히 꺾었다. 리무진의 타이어가 비명을 지르며 궤도를 이탈했고, 오토바이는 아슬아슬하게 차체 옆면을 스쳐 지나갔다. 충격의 여파로 내 몸이 조수석 시트에 거칠게 부딪쳤다. 어깨 통증이 뇌리를 찔렀지만, 나는 고통 반응 인위적 억제 기술을 가동해 신음 소리 하나 내지 않고 평정심을 유지했다.


“죄, 죄송합니다 도련님!”


“계속 가. 멈추지 마.”


나는 안경을 고쳐 쓰며 차갑게 명령했다. 백미러 너머로 빨간불에 걸려 교차로 반대편에 갇힌 송 비서의 검은색 소나타가 보였다. 하지만 송 비서는 차에서 내려 골목길을 걸어서라도 추격을 계속할 위인들이었다.


“여기서 차량을 바꿔탄다.”


나는 사전에 설계해 둔 알리바이 동선을 가동했다. 리무진이 시청 인근의 대형 마트 지하 주차장으로 미끄러지듯 진입했다. 주차장 내부의 어두운 사각지대에 도달하자마자, 나는 문을 열고 내렸다. 미리 대기시켜 둔 일반 택시 한 대가 시동을 켠 채 매연을 내뿜고 있었다.


“최 기사, 너는 리무진을 몰고 아너스 국제학교 정문으로 가. 오 집사에게는 도련님이 등교 도중 갑자기 기분이 상해 개인 데이트를 하러 가셨다고 보고해라.”


“알겠습니다, 도련님.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최 기사가 이끄는 리무진이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모습을 확인한 뒤, 나는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일반 택시의 뒷좌석에 올라탔다. 송 비서의 카메라는 이제 텅 빈 리무진과 최 기사만을 쫓을 터였다. 완벽한 시각적 알리바이의 완성이었다.


택시는 제주 시청 뒤편의 낡은 주택가 골목길을 지나 허름한 원룸 건물 앞에 멈춰 섰다. 상류층의 화려함과는 지독하게 대비되는, 곰팡이 냄새와 매연이 뒤섞인 밑바닥의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나는 익숙한 고향의 공기를 들이마시는 듯한 기묘한 안도감을 느끼며 지하 계단으로 걸음을 옮겼다.


***


똑, 똑, 똑.


‘한도현과의 3중 암호 통신 규칙’에 따른 특유의 노크 소리가 지하 원룸의 철문을 두드렸다. 잠시 후, 안쪽에서 철컥거리는 자물쇠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미세하게 열렸다. 부스스한 머리에 다크서클이 턱 끝까지 내려온 천재 해커, 한도현이 푱 하고 껌을 씹으며 나를 맞이했다.


“어우, 한성그룹 황태자님께서 이런 누추한 지하 벙커까지 행차하셨네.”


한도현이 시니컬하게 웃으며 길을 비켜주었다. 원룸 내부에는 서너 대의 모니터가 푸른빛을 내뿜으며 윙윙거리는 열기를 뿜어내고 있었고, 바닥에는 정체불명의 전선들이 뱀처럼 엉켜 있었다. 책상 위에는 먹다 남은 컵라면 용기와 담배꽁초가 가득한 재떨이가 놓여 있었다. 에메랄드 빌라의 화려함 이면에 숨겨진, 진짜 날것의 아지트였다.


나는 방으로 들어서며 가죽 장갑을 벗어 던졌다.


“송 비서의 미행이 붙었었어. 최 기사를 이용해 따돌렸지만 오래 버티지는 못해. 오 집사가 전산망을 뒤지기 전에 대영 바이오의 계좌 동향을 해킹해야 한다.”


“걱정 마셔. 내 보안 서버는 국가 안보국이 들이닥쳐도 3분은 버티니까.”


한도현이 의자에 앉아 키보드 위에 손가락을 올렸다. 그의 손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하자, 화면 위로 수많은 녹색 코딩 줄과 데이터 패킷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자, 요청하신 대영 바이오의 거래소 백도어를 가동합니다. 오라클의 그 잘난 임태오 도련님이 네 계좌를 털어먹으려고 준비한 시스템 우회 경로를 역추적해 봤는데 말이야…….”


도현의 눈동자가 모니터의 푸른 빛을 받아 날카롭게 빛났다.


“재미있는 게 나오네. 임태오와 서민준 일파가 대영 바이오 주식에 개인 차명 계좌를 동원해서 엄청난 규모의 ‘공매도’를 쳐두었어.”


“공매도라고?”


나는 한도현의 어깨 너머로 모니터 화면을 응시했다.


화면에는 서민준과 임태오가 주도하는 사설 투자 조합 ‘골드 링’의 비공개 자산 포트폴리오 원장이 실시간으로 해킹되어 출력되고 있었다. 그들이 동원한 차명 법인 계좌 리스트와 거래 내역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다.


그들은 대영 바이오의 임상 3상 실패 찌라시를 퍼뜨려 주가를 인위적으로 폭락시킨 뒤, 미리 쳐둔 공매도 포지션을 통해 수백억 원의 차익을 남기려 하고 있었다. 나에게 대영 바이오 주식을 매수하라고 권한 것은, 내가 100억 원의 자금을 투입해 주가를 일시적으로 떠받쳐주는 동안 자신들은 고점에서 공매도 물량을 대거 확보하기 위한 미끼로 쓰기 위함이었다.


“보여? 이 차명 계좌들의 레버리지 비율이 무려 10배야.”


한도현이 킬킬거리며 화면의 특정 수치를 가리켰다.


“대영 바이오의 주가가 상장폐지되지 않고 오히려 폭등하는 순간, 이 자식들은 빌린 주식을 갚지 못해서 마진콜에 걸려. 하룻밤 사이에 가문의 자금 수백억 원이 공중분해 되는 거지.”


나는 안경 너머로 쏟아지는 차명 계좌 리스트를 응시했다.


임태오와 서민준. 그들은 완벽한 정보 격차를 이용해 나를 사냥하려 했다. 가짜 상속자의 한계를 비웃으며, 나를 오라클의 제물로 삼으려 했다.


하지만 그들은 알지 못했다. 그들이 쓰레기라 믿고 장부에서 지워버린 유전자 가위 원천 특허권의 진짜 가치가 스위스 특허청에 은닉되어 있음을. 그리고 내가 그 사실을 이미 간파하고 있음을.


그 특허 가치가 공식 공시되는 순간, 시장의 주가는 그들의 통제를 벗어나 하늘을 뚫고 폭등할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상승이 아니라, 공매도 세력의 목을 단숨에 베어버리는 잔혹한 ‘숏스퀴즈’의 서막이 될 터였다.


“한도현, 가짜 투자 찌라시 살포 준비해.”


나는 모니터에 비친 서민준과 임태오의 차명 계좌 리스트를 내려다보며, 내 안에서 솟구치는 차가운 지적 희열을 느꼈다.


“그들이 파놓은 늪에, 자신들의 손으로 전 재산을 처넣게 만들어 주지.”


내 입술 사이로 서늘하고 잔혹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적들의 완벽한 급소를 쥐어쥔 순간이었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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