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이 든 성배
오라클 클럽하우스 로비의 대리석 바닥은 구두굽이 부딪칠 때마다 서늘한 금속성을 머금은 파열음을 내뱉었다. 서민준이 흙빛이 된 얼굴로 주저앉아 신음하는 동안, 내 앞을 가로막은 임태오의 눈빛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단정하게 빗어 넘긴 가르마와 지적인 안경테 너머로, 그의 계산기 같은 눈동자가 나를 정밀 실사하듯 위아래로 훑어 내렸다.
“과연 소문대로군.”
임태오가 손목에 찬 스마트워치를 툭툭 두드리며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머리를 다치더니 아주 딴사람이 되어서 돌아왔어, 서지한. 하지만 오라클은 말 한마디로 사람을 겁박하는 양아치들의 놀이터가 아니다. 이곳에 발을 들이고 싶다면, 진짜 상류층의 검증을 통과해야지.”
나는 안경테를 가운데 손가락으로 가볍게 밀어 올렸다. 안나 장이 주입했던 오만한 각도로 턱을 치켜들고, 내 왼쪽 손목에 채워진 파텍필립 시계의 초침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규칙적인 태엽 소리가 내 요동치는 맥박을 억지로 붙잡아 매고 있었다.
“검증이라.”
나는 피식 웃으며 비스듬히 고개를 꺾었다. 진짜 서지한이라면 이 상황에서 어떤 태도를 취했을까. 상대의 가치를 짓밟고, 자신이 우위에 있음을 증명하려 들었을 터였다.
“귀찮게 굴지 마라, 임태오. 네놈들이 만든 그 알량한 친목 도모회 따위에 가입하는 데 내가 시험까지 치러야 하나?”
“친목 도모회?”
임태오의 미간이 미세하게 좁아졌다. 내 안의 ‘미세 표정 실시간 추적 기술’이 그의 눈꼬리 근육이 0.2초 동안 경직되는 것을 잡아냈다. 자존심이 상했다는 명백한 증거였다. 임태오는 오라클의 재무 담당이자 실질적인 브레인이었다. 그에게 오라클은 단순한 동아리가 아니라, 자신들의 가문이 굴릴 자본의 예비 시험장이었다.
“오라클 내부에서 움직이는 비공식 자산 조합 ‘골드 링’의 자금 규모가 얼마나 되는지 알고서도 그런 소리가 나올까? 서지한 도련님.”
임태오가 태블릿 PC를 켜서 내 눈앞에 들이밀었다. 화면에는 암호화된 해외 계좌의 자산 변동 그래프가 실시간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수백억 원대에 달하는 유동 자산. 심장이 다시금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저 돈을 움직일 수만 있다면, 사채업자 독사의 손아귀에서 고통받는 어머니를 구하고 내 진짜 신분을 완벽히 세탁할 법적 방어막을 구축할 수 있었다.
“좋아. 오라클의 정식 가입 요건을 제안하지.”
임태오가 안경을 고쳐 쓰며 잔인한 호의가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3일이다. 3일 안에 모의 투자 계좌로 15%의 수익률을 증명해 봐. 성공하면 네 오만한 태도를 인정하고 오라클 골드 카드를 넘겨주지. 하지만 실패하면... 네가 서 회장님의 서자이든 뭐든, 아너스 국제학교 내에서 넌 영원히 쓰레기 취급을 받게 될 거다.”
그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태블릿 화면에 특정 기업의 종목 코드를 띄웠다.
“쉽지 않은 도전이니 특별히 힌트를 주지. ‘대영 바이오’. 대영그룹의 방계 계열사인데, 조만간 스위스 임상 3상 돌파 공시가 나올 거라는 정보가 사설 가십지에 돌고 있어. 이미 정보가 빠른 실버 등급 애들은 매집을 시작했지. 이걸로 시작해 보는 게 어때?”
‘대영 바이오.’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내 뇌리 속에 서늘한 경보음이 울렸다. 임태오의 미간과 턱 끝 근육이 지나치게 평온했다. 마치 굶주린 늑대가 덫 위에 고기 한 점을 얹어두고 먹잇감을 기다리는 듯한 기괴한 여유.
이것은 독이 든 성배였다. 그들이 파놓은 함정이 분명했다.
하지만 나는 내 안의 불안을 완벽히 감추고, 오히려 서지한 특유의 썩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3일에 15%라니. 너무 시시해서 하품이 나오는군. 그 성배, 기꺼이 마셔주지.”
***
제주 에메랄드 빌라의 밤은 유난히 깊고 조용했다. 거실 구석구석에 배치된 오 집사의 감시 카메라들이 붉은 불빛을 깜빡이며 내 일거수일투족을 렌즈에 담고 있었다.
나는 침실 문을 걸어 잠그고 2층 서재의 가죽 의자에 몸을 묻었다. 책상 위에는 무도수 금테 안경이 놓여 있었고, 내 앞에는 한성그룹 법인 명의로 지급된 노트북이 켜져 있었다.
“하아...”
긴장이 풀리자 가슴속이 타들어 가는 듯한 갈증이 밀려왔다. 나는 주머니 속 비타민 통에서 신경안정제 디아제팜 한 알을 꺼내 물도 없이 삼켰다. 씁쓸한 약물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자, 요동치던 심박수가 서서히 60대로 내려앉으며 차가운 이성이 머릿속을 채웠다.
‘임태오가 권한 대영 바이오. 단순한 호재 주식일 리가 없다.’
나는 노트북 자판을 두드려 대영 바이오의 최근 주가 차트를 열었다. 화면에는 가파른 상승 곡선이 그려져 있었다. 최근 일주일간 거래량이 비정상적으로 폭증하며 개미 투자자들의 매수세가 유입되고 있었다. 언론사 찌라시들은 매일같이 ‘스위스 임상 3상 성공 임박’이라는 자극적인 헤드라인을 쏟아내고 있었다.
처음에는 나 역시 일반 포털의 주식 토론방과 호가창의 왜곡된 거래량에 속아 넘어갈 뻔했다. 이 정도 기세라면 3일 안에 15%가 아니라 50%의 수익도 가능해 보였다.
하지만 밑바닥 사채업자들에게 쫓기며 돈의 잔혹한 생리를 뼈저리게 배웠던 내 생존 본능이 소리치고 있었다. 진짜 거물들은 결코 대중에게 진짜 고기를 나누어 주지 않는다.
나는 대영 바이오의 최근 3개년 감사 보고서와 분식회계 의혹 자료, 그리고 현금 흐름표 원장을 다운로드했다. 방대한 분량의 PDF 파일들이 모니터 화면을 가득 채웠다. 눈이 시려오고 편두통이 관자놀이를 짓눌렀지만, 나는 눈을 감지 않았다.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다만 인간이 숫자를 감출 뿐이다.’
내 안의 ‘고속 기업 재무제표 맹점 포착’ 능력이 가동되기 시작했다. 내 눈동자가 수천 개의 숫자와 회계 계정 과목들을 초 단위로 훑어 내렸다.
자산 총계 1,200억 원. 부채 비율 45%. 표면적으로는 바이오 벤처기업 치고는 매우 건전한 재무 구조였다. 하지만 영업활동 현금 흐름표의 마지막 줄을 읽는 순간, 내 손가락이 멈췄다.
매출 채권의 회수 기간이 비정상적으로 길었다. 장부상으로는 매출이 발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었지만, 실제로 회사 통장에 들어온 현금은 거의 없었다. 게다가 가공의 거래처로 의심되는 스위스 소재의 유령 회사 ‘라피스 홀딩스(Lapis Holdings)’로 매달 수십억 원 상당의 선급금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가짜 거래군.”
나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대영 바이오는 대영그룹 내부의 비자금을 세탁하기 위해 가짜 매출을 일으키고, 그 돈을 해외 페이퍼 컴퍼니로 유출하고 있었다. 그리고 스위스 임상 3상 성공이라는 가짜 찌라시를 퍼뜨려 주가를 인위적으로 부풀린 뒤, 대주주 지분을 고점에서 전량 매도하고 회사를 상장폐지 시킬 계획이었던 것이다.
임태오는 내가 이 주식을 매수하는 즉시 상장폐지라는 절벽 아래로 추락하도록 완벽한 덫을 놓은 것이었다. 내가 가진 모의 투자 자금 100억 원이 공중분해 되는 순간, 배임과 투자 실패의 낙인이 찍혀 오라클 가입은커녕 한성 가문에서도 무능한 서자로 낙인찍혀 쫓겨날 판이었다.
‘여기서 멈춰야 하나?’
아니, 그럴 수 없었다. 이 덫을 피해 다른 안전한 우량주를 매수한다면 3일 안에 15%라는 가혹한 수익률을 달성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다. 임태오의 덫을 역이용해 그들의 심장부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혀야만 했다.
나는 밤을 새우며 대영 바이오의 재무제표 마지막 페이지, 주석 사항의 미세한 각주들을 훑어 내렸다. 새벽 4시를 가리키는 시계 소리가 방 안의 정적을 두드렸다. 머리가 깨질 듯 아파왔고, 이마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스위스 특허청의 특허 양도 문서 데이터베이스를 해킹 우회망으로 접속해 대영 바이오의 특허 번호들을 하나씩 대조해 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장부상 가치 ‘0원’으로 폐기 처리되어 있던 한 무형 자산의 세부 내역을 발견한 순간, 내 눈이 가늘어졌다.
“이건...”
내 입술 사이로 서늘한 탄성이 흘러나왔다.
대영 바이오가 3년 전 ‘가치 없음’으로 분류해 장부에서 지워버린 유전자 가위 원천 특허 기술. 하지만 스위스 특허청에 등록된 진짜 법적 소유주는 대영 바이오가 설립한 해외 페이퍼 컴퍼니였고, 이 특허의 실소유 권한은 대영그룹의 직계 승계 구도와 밀접하게 연관된 핵심 자산이었다.
그들은 회사를 상장폐지 시켜 소액 주주들의 지분을 휴지조각으로 만든 뒤, 이 특허권을 대영그룹 본사로 헐값에 양도받아 가문의 승계 자금으로 쓰려던 참이었다.
가치 0원짜리 쓰레기 장부 뒤에 숨겨진, 수천억 원 가치의 진짜 황금 열쇠.
나는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안경을 벗어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적들이 파놓은 독이 든 성배의 밑바닥에, 그들이 가장 감추고 싶어 했던 치명적인 약점이 잠들어 있었다.
‘임태오, 서민준. 너희가 내 목을 치기 위해 준비한 칼날이, 결국 너희 가문의 심장을 찌르게 될 거다.’
하지만 이 숨겨진 특허권의 존재를 세상에 공시하고 실제 시장의 주가를 폭등시키기 위해서는, 나 혼자만의 힘으로는 부족했다. 학교 전산망을 우회해 금융 거래소의 백도어를 가동할 수 있는 천재 해커 한도현의 기술적 지원이 절실했다.
나는 암호화된 투폰을 켜서 한도현에게 짧은 위성 메시지를 전송했다.
[내일 아침, 시청 인근 아지트에서 본다. 준비해라.]
전송 완료 표시가 뜨는 것을 확인한 나는 노트북을 덮었다. 창밖으로 제주의 서늘한 새벽안개가 에메랄드 빌라의 정원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내일 아침, 이 안개를 뚫고 나가는 순간부터 진짜 전쟁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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