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등교, 그리고 정글
오 집사의 매서운 눈빛이 내 손가락 끝에 꽂히는 순간, 에메랄드 빌라의 거실은 숨이 막힐 듯한 침묵으로 가득 찼다.
엄지와 검지로 꼬집듯 쥐어야 하는 서지한의 예법과 달리, 내 손가락은 천박하게 찻잔 손잡이 구멍을 관통해 움켜쥐고 있었다. 공사장에서 믹스커피 종이컵을 쥐던 18년의 구차한 신체 기억이 이 결정적인 순간에 튀어나온 것이었다.
오 집사의 은테 안경 너머 안광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가 입을 열어 내 정체를 추궁하기 직전, 나는 뇌리를 스치는 안나 장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서지한은 예민하고 제멋대로인 폭군이다. 완벽하지 않은 것은 참지 못해.'
나는 즉각 찻잔을 쥔 손에 힘을 슬그머니 풀었다.
찰랑!
"앗, 뜨거워!"
뜨거운 다질링 차가 내 손등과 손가락 위로 쏟아졌다. 나는 고의로 거칠게 찻잔을 유리 테이블 위로 내던지듯 내려놓았다.
쨍그랑!
최고급 도자기 찻잔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뒤집어지고, 갈색 액체가 테이블 위로 사방으로 번져 나갔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오 집사를 향해 날카롭게 소리쳤다.
"오 집사! 너 지금 나랑 장난해?"
내 목소리는 안나 장에게 훈련받은 오만하고 중저음의 톤을 유지하면서도, 서지한 특유의 가학적인 히스테리를 완벽히 담아내고 있었다.
"도, 도련님? 무슨 말씀이신지..."
오 집사가 당황하여 눈을 크게 떴다.
"차가 왜 이리 지나치게 뜨거워? 게다가 이 잔은 또 뭐야? 손잡이 구멍이 이따위로 좁아터졌는데 이걸 손가락으로 제대로 쥐라는 거야? 런던의 요양원에서도 이런 천박한 졸부들이나 쓸 법한 잔은 내오지 않았어!"
나는 테이블 위의 린넨 냅킨을 신경질적으로 낚아채 손등을 거칠게 닦아낸 뒤, 냅킨을 오 집사의 발밑으로 내던졌다.
"온도도 못 맞추고, 식기도 개판이고. 한미정 여사가 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라고 보낸 줄 알았더니, 고작 나를 화상 입혀서 죽이려고 보낸 거였나?"
오 집사의 안색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그의 눈빛에 서려 있던 의심은, 서지한 특유의 안하무인 격인 히스테리 앞에 일순간 짓눌려 흩어졌다. 오 집사는 황급히 허리를 90도로 숙였다.
"죄송합니다, 도련님! 제 불찰입니다. 온도가 맞지 않으셨다니 즉시 새로 준비하겠으며, 식기도 도련님의 손에 맞는 넓은 손잡이의 영국제 잔으로 교체하겠습니다."
"됐어. 입맛 다 버렸으니까 당장 치우고 나가."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2층 침실로 걸음을 옮겼다. 계단을 오르는 내내 어깨를 거만하게 뒤로 젖히고, 절제된 걸음걸이를 유지했다. 하지만 방 문을 닫고 걸쇠를 잠그는 순간, 나는 문에 기대어 주르륵 주저앉았다.
"하아... 하아..."
심장이 갈비뼈를 뚫고 나올 것처럼 요란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손끝이 차갑게 떨렸다. 옷장 서랍 깊숙이 숨겨둔 비타민 통을 꺼내 신경안정제 디아제팜 한 알을 입에 털어 넣었다. 물도 없이 침을 삼키자 식도가 타들어 가는 듯했다.
겨우 첫날이었다. 고작 집사 한 명의 의심을 피하는 것만으로도 수명이 단축되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가평의 사설 병원에 누워 내 소식만을 기다리는 병약한 어머니 이신혜를 위해서라도, 나는 내일 아침 아너스 국제학교의 정글로 걸어 들어가야만 했다.
***
다음 날 아침, 제주도 서귀포시의 웅장한 자연 한가운데 세워진 아너스 국제학교 본관은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중세 성곽 같았다.
최고급 리무진의 뒷좌석에서 내린 나는 무도수 금테 안경을 고쳐 쓰며 차가운 대리석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연간 학비가 수억 원에 달하며, 학생들의 성적과 부모의 기부금 지분으로 철저히 계급이 나뉘는 초호화 아너스 국제학교.
교문을 통과하는 학생들의 가슴팍에는 각기 다른 색깔의 배지가 반짝이고 있었다. 기부금 없이 성적으로만 입학한 브론즈 등급(특별전형 장학생)의 동색 배지, 중견기업 자제들의 실버 등급 은색 배지, 그리고 한성그룹을 비롯한 초상류층 자제들의 골드 등급 금색 배지.
내 가슴팍에는 서지한의 신분을 증명하는 눈부신 금색 배지가 달려 있었다.
"어...? 저거 서지한 아니야?"
"대박, 런던에서 식물인간 상태로 요양 중이라더니 진짜 복학했네?"
"근데 분위기가 왜 저러지? 원래는 맨날 교복 풀어헤치고 다니던 양아치였잖아."
복도를 걸어가는 내내 사방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들의 시선을 완전히 무시한 채, 턱을 살짝 들어 올리고 오만한 걸음걸이로 경제학 특별 세미나실로 향했다. 시선은 정면을 향해 있었지만, 안경 렌즈 너머의 눈동자는 주변의 감시 카메라 위치와 학생들의 미세한 표정을 극도로 경계하며 스캔하고 있었다.
나는 지금 '의혹의 대상'이었다. 과거의 방탕했던 행동과 너무 달라진 내 태도는 그들에게 훌륭한 가십거리이자 의심의 미끼였다.
세미나실 내부는 호텔 콘퍼런스 룸을 방불케 할 정도로 화려했다. 대학 강의실 모양의 계단식 좌석 맨 앞줄에는 골드 등급 자제들이 거만하게 앉아 있었고, 뒤쪽으로 갈수록 실버와 브론즈 등급의 학생들이 주눅 든 채 앉아 있었다.
나는 맨 앞줄, 서지한의 지정석에 앉아 왼쪽 손목의 파텍필립 시계를 가볍게 매만졌다.
딸칵.
강단에 선 인물은 희끗희끗한 백발에 단정한 멜빵 슬랙스를 입은 노신사, 최민우 교수였다. 한국은행 통화정책위원을 역임하고 퇴직을 앞둔 경제학계의 거두. 그의 깊이를 알 수 없는 온화한 눈빛이 세미나실 전체를 훑었다.
최 교수는 분필을 집어 들고 칠판에 복잡한 기업 합병 재무 데이터를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한성케미칼과 대영정밀의 M&A 합병 가치 평가 데이터]
"오늘의 발제 주제다."
최 교수의 단호한 목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울려 퍼졌다.
"두 기업의 합병 시 발생하는 미래 현금 흐름과 거시경제학적 시너지를 분석해라. 이 데이터가 보여주는 합병 가치의 핵심 맹점이 무엇인지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있나?"
세미나실에 무거운 정적이 감돌았다. 대기업의 실제 M&A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고난도의 문제였기에 아무도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그때, 내 옆자리에 앉아 있던 정해인이 단정하게 손을 들어 올렸다. 전교 1등을 놓치지 않는 대법관 가문의 영애이자 지독한 수재. 그녀의 은테 안경 뒤로 지적인 안광이 빛났다.
"정해인 양, 발표해 보게."
정해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막힘없는 목소리로 답변을 쏟아냈다.
"DCF(현금흐름할인법) 모델에 따르면, 대영정밀의 향후 3개년 영업이익 성장률은 연평균 12%로 추정됩니다. 한성케미칼의 원자재 공급망과 결합할 경우, 생산 단가 절감으로 인한 시너지는 약 450억 원 규모에 달합니다. 따라서 거시경제학적 관점에서 이번 M&A는 한성그룹의 화학 부문 지배력을 공고히 하는 완벽한 합병안입니다."
완벽한 교과서적인 답변이었다. 주변의 실버와 골드 등급 학생들이 감탄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고, 최 교수 역시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최 교수의 시선은 정해인에게서 멈추지 않았다. 그의 날카로운 안광이 서서히 이동하더니, 맨 앞줄 구석에 앉아 있는 나를 향해 꽂혔다.
"흥미로운 답변이군. 그렇다면... 오랜 요양을 마치고 돌아온 서지한 군의 의견은 어떤가? 정해인 양의 분석에 동의하나?"
순간, 세미나실 내부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뒤쪽 좌석에서 나직한 비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서지한한테 저걸 물어본다고?"
"걔는 돈이나 쓸 줄 알지, M&A가 뭔지는 알까?"
"머리 다쳐서 복학했다더니, 교수님이 너무 가혹하시네."
그들의 비웃음은 내 귀에 닿지 않았다. 내 가슴속 심박수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긴장감에 무도수 금테 안경테를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며 말을 떼는 데 약 2초간의 정적이 발생했다. 오 집사의 감시망을 피하느라 쌓인 정신적 피로가 뇌를 압박했다.
하지만 나는 이내 디아제팜의 약효를 느끼며 차갑게 가라앉았다.
'평범한 답변으로는 서지한의 방탕한 과거를 덮을 수 없다. 머리를 다친 후 천재로 각성했다는 명분을 세우려면, 압도적인 지적 충격이 필요해.'
나는 칠판에 적힌 재무 데이터를 정밀하게 노려보았다. 내 뇌 속에서 빈민가 시절 사채 장부와 버려진 상법 교과서를 밤새 독학하며 다진 '고속 기업 재무제표 맹점 포착' 기술이 무서운 속도로 가동되기 시작했다.
수많은 숫자와 그래프들이 내 시야에서 재정렬되었다. 대영정밀의 매출 채권 회수 기간, 재고자산회전율, 그리고 단기 차입금의 기묘한 만기 구조...
내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정해인 양의 분석은... 교과서적으로는 훌륭합니다."
나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의자를 뒤로 밀어내는 가벼운 소음만이 세미나실의 정적을 깼다. 내 목소리는 낮고 차가웠으며,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하지만, 그 분석은 가장 결정적인 전제가 잘못되었습니다."
"전제가 잘못되었다고?"
정해인의 미간이 날카롭게 찌푸려졌다. 그녀의 눈빛에 불쾌함과 경쟁심이 동시에 서렸다.
"네, 정해인 양. 네가 대입한 데이터 자체가 '가짜'니까요."
나는 자리에서 걸어 나와 교단 앞으로 향했다. 안나 장에게 배운 절제되고 품격 있는 걸음걸이로 칠판 앞에 서서, 최 교수가 쥐고 있던 분필을 자연스럽게 넘겨받았다.
서서, 서걱.
나는 칠판에 적힌 대영정밀의 매출 채권 회수 기간 '45일'이라는 숫자에 거칠게 엑스(X) 표를 쳤다.
"대영정밀의 재무제표상 매출 채권 회수 기간은 45일로 기록되어 있지만, 실제 원장을 뜯어보면 비정상적인 왜곡이 존재합니다. 지난 분기 매출의 30%가 모기업인 대영건설과의 내부 거래로 발생했고, 이 채권의 실제 회수 기간은 180일이 넘습니다. 즉, 매출 채권을 조기 회수한 것처럼 꾸며 단기 유동성을 부풀린 전형적인 분식회계입니다."
나는 분필을 쥔 손으로 칠판의 다른 구석에 대영정밀이 은닉해 둔 단기 차입금 우회 통로를 빠른 속도로 적어 내려갔다.
"진짜 맹점은 여기 있습니다. 대영정밀은 합병 직전 부실 채권을 가리기 위해 특수관계인 계좌를 통해 자금을 우회 송금받아 일시적으로 부채를 상환한 것처럼 꾸몄습니다. 이 데이터를 그대로 대입해 M&A를 진행하면, 한성케미칼은 합병 즉시 대영정밀이 숨겨둔 1,200억 원 규모의 잠재적 부실 채권을 고스란히 떠안게 됩니다. 시너지가 아니라, 독약이 든 성배를 마시는 꼴이죠."
탁.
나는 분필을 내려놓고 손을 털었다.
세미나실 내부는 찬물을 끼얹은 듯 기괴한 정적에 휩싸였다. 비웃음을 흘리던 골드와 실버 등급 학생들의 얼굴이 사색이 되어 굳어 있었다.
정해인은 칠판에 적힌 내 계산식을 바라보며 안경을 치켜올렸다. 그녀의 동공이 경악과 주체할 수 없는 라이벌 의식으로 거칠게 흔들리고 있었다.
"지한아... 너 대체 그 데이터를 어떻게..."
정해인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나는 대답 대신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최민우 교수를 바라보았다. 최 교수는 찻잔을 든 채, 깊이를 알 수 없는 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의 온화한 안광 너머로 내 본질을 꿰뚫어 보려는 듯한 예리한 시선이 느껴졌다.
"아주... 흥미로운 분석이군, 서지한 군."
최 교수의 나직한 한마디가 정적을 깨뜨렸다.
나는 안경을 가볍게 밀어 올리며 내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지적 전투에서의 완벽한 판도 뒤집기. 하지만 승리의 카타르시스를 만끽할 시간은 길지 않았다.
진.
내 주머니 속 암호화된 투폰이 미세하게 진동했다. 한도현이 보낸 위성 메시지였다.
[서민준이 오라클 클럽하우스 입구에서 너를 대기시키고 있어. 조심해.]
안경 렌즈 너머 내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정글의 첫 번째 사냥꾼이 마침내 이빨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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