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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결의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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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이이이—.


귓가를 찌르는 날카로운 이명이 뇌수를 타고 흘렀다. 강태성은 미간을 좁히며 책상 모서리를 꽉 움켜쥐었다. 손끝이 차갑게 식어가는 감각과 함께 관자놀이가 터질 듯한 두통이 밀려왔다.


어젯밤부터 이어진 극도의 긴장감, 그리고 오 집사의 감시망을 흐트러뜨리기 위해 물 없이 삼킨 신경안정제 디아제팜의 부작용이었다. 약물은 그의 심박수를 강제로 60bpm 대에 묶어두었지만, 그 대가로 지독한 이명과 두통이라는 청구서를 던졌다.


태성은 조용히 왼손을 들어 셔츠 소매를 걷어올렸다. 전완부 안쪽에 길게 그어진 붉은 찰과상이 보였다. 어제 보건실에서 정수아 교사가 극심한 패닉 속에서 주삿바늘을 다루다 남긴 미세한 상처 흔적이었다. 빨갛게 부어오른 상처 위로 알코올 스왑을 꾹 누르자, 쓰라린 통증이 신경을 깨웠다.


하지만 진짜 고통은 그게 아니었다. 채혈 의자의 철제 프레임에 강하게 부딪혔던 왼쪽 어깨가 움직일 때마다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기숙사 락커룸에서 남궁철과의 충돌로 찢어졌던 가짜 실리콘 흉터는 어제의 충격으로 가장자리가 완전히 너덜너덜해진 상태였다. 옷자락이 쓸릴 때마다 가짜 피부 밑의 진짜 살점이 찢겨 나가는 듯한 감각이 생생했다.


태성은 거울을 보며 무도수 금테 안경을 고쳐 썼다. 편광 코팅된 렌즈가 통증으로 흔들리는 그의 동공을 완벽히 감추어 주었다. 왼쪽 손목에 채워진 서지한의 한정판 파텍필립 시계의 초침이 무심히 흘러가고 있었다.


오전 9시 45분.


서울의 유전자 연구소로 직송된 채혈 샘플의 분석이 완료될 시간이었다.


***


같은 시각, 서울 태평로에 위치한 한성그룹 본사 31층 부회장실.


통유리창 너머로 서울 도심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집무실 내부는 숨이 막힐 듯한 침묵으로 가득 차 있었다. 가죽 소파에 깊숙이 몸을 묻은 한성그룹 부회장 서태진은 포마드로 거칠게 빗어 넘긴 백발 아래로 매서운 안광을 번뜩이고 있었다.


그의 손가락 끝이 책상 위의 유선 수화기를 가볍게 두드렸다. 규칙적인 탁, 탁, 탁 소리가 비서들의 숨통을 죄었다.


서태진은 수화기를 들어 단축 번호를 눌렀다. 신호음이 단 한 번 울리기도 전에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임 국장. 어떻게 되었나.”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국가공인 유전자 연구소 책임자, 임 국장의 목소리는 승리를 확신하는 오만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서태진에게 막대한 뇌물을 받고 유전자 감정 데이터 조작을 약속한 타락한 과학자였다.


[부회장님, 안 그래도 방금 최종 분석 장비의 승인 버튼을 눌렀습니다. 오 집사가 제주도에서 보내온 서지한 도련님의 타액 샘플과, 회장님의 DNA 대조 분석이 끝나는 즉시 전산망으로 보고서가 송출될 예정입니다.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결과는 당연히…… ‘친자 불일치’로 출력되도록 세팅해 두었습니다.]


서태진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잔혹한 소시오패스의 미소였다.


“수고했군. 결과 보고서가 내 컴퓨터로 송출되는 즉시, 대기 중인 법률팀과 특수부 박 검사를 움직여 제주도 캠퍼스에서 그 가짜 놈을 사기 및 대역죄로 현장 체포하겠다. 한미정 그 여자의 목줄까지 한꺼번에 끊어버릴 기회지.”


[예, 부회장님. 지금 화면에 전송 게이지가 올라가고 있습니다. 90%…… 95%…… 완료되었습니다. 지금 보고서를 송출합니다.]


서태진은 전화를 끊지 않은 채, 책상 위의 모니터 화면을 주시했다. 메일 수신함에 붉은색 경고 표시와 함께 국가공인 유전자 연구소의 직인이 찍힌 극비 PDF 파일이 도착했다.


서태진은 마우스를 더블 클릭했다. 암호화된 파일이 열리고, 하얀 바탕 위에 정밀한 유전자 배열 그래프가 길게 나열되었다. 서태진의 눈이 가장 하단의 최종 판결 문구로 향했다.


[최종 감정 결과: 피감정인 서지한은 감정 의뢰인 서창현과 생물학적으로 99.99% 친자(조부-손자) 관계가 성립함.]


순간, 서태진의 안광이 굳어졌다. 마우스를 쥔 그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뭐?”


그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모니터 앞으로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붉은색 직인 옆에 선명하게 박힌 글자는 분명히 ‘일치’였다. 수십 개의 대조 유전자 마커가 단 하나의 오차도 없이 진짜 서지한의 데이터와 완벽하게 일치하고 있었다.


“임 국장! 이게 무슨 소리야! 일치라니? 99.9% 일치라고 적혀 있잖아!”


서태진이 수화기에 대고 피를 토하듯 고함을 질렀다. 수화기 너머의 임 국장 역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 그럴 리가 없습니다, 부회장님! 제가 직접 장비의 데이터 값을 불일치로 고정해 두었는데…… 어떻게 이런 결과가…… 잠시만요! 전산 서버 로그를 확인해 보겠습니다! 어, 어라? 들어온 원본 샘플의 DNA 구조 자체가…… 진짜 서지한의 것과 완벽하게 똑같습니다! 기계 오류가 아니라, 애초에 들어온 피가 진짜 서지한의 피였습니다!]


“이 쓸모없는 새끼가!”


서태진은 이성을 잃고 수화기를 벽을 향해 내던졌다.


콰창!


플라스틱 수화기가 대리석 벽면에 부딪히며 산산조각이 나 바닥으로 흩어졌다. 서태진은 가슴을 거칠게 들썩이며 책상 위의 서류들을 전부 쓸어버렸다.


“어떻게…… 어떻게 진짜일 수가 있어? 오 집사 그 늙은 사냥개가 눈앞에서 직접 채혈하는 것을 감시했다고 보고했는데!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그는 제주도 에메랄드 빌라에 있는 오 집사의 핫라인 번호를 매섭게 누르기 시작했다.


***


제주 에메랄드 빌라 2층 서재.


서늘한 바람이 발코니 문틈을 타고 들어와 커튼을 흔들었다. 태성은 책상 앞에 단정하게 앉아 찻잔을 들고 있었다. 그의 맞은편에는 수석 집사 오 집사가 등 뒤로 손을 모은 채 꼿꼿이 서 있었다.


오 집사의 양복 주머니 속 태블릿 PC에서 가벼운 알림음이 울렸다. 본사 보안팀으로부터 유전자 감정 결과 보고서가 공유된 것이었다.


오 집사는 조용히 태블릿을 꺼내 화면을 켰다. 그의 은테 안경 너머 매서운 눈동자가 화면의 텍스트를 빠르게 훑어내렸다.


그리고 찰나의 순간, 오 집사의 주름진 얼굴이 기괴할 정도로 굳어졌다. 언제나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던 늙은 사냥개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그의 시선이 태블릿 화면과, 앞에 앉아 차를 마시는 태성의 얼굴을 번갈아 오갔다.


‘일치……? 조부 서창현 회장과 99.9% 친자 일치라고?’


오 집사의 등 뒤로 식은땀이 서늘하게 흘러내렸다. 그는 어젯밤 도련님의 방 근처에서 들린 소음과, 정수아 교사의 떨리던 손끝, 그리고 도련님이 보여준 수상한 위성 투폰 때문에 이번에야말로 진짜 신분이 까발려질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서태진 부회장에게 이미 사기죄 기습 고소 준비를 끝내라고 보고까지 마친 상태였다.


그런데 결과는 완벽한 ‘진짜’였다. 과학적이고 생물학적인 물증이 눈앞의 소년이 진짜 한성그룹의 서자 서지한임을 공인하고 있었다.


태성은 찻잔을 테이블 위에 소리 없이 내려놓았다. 달그락거리는 미세한 도자기 마찰음이 고요한 서재를 울렸다.


태성은 안경을 가운데 손가락 끝으로 가볍게 밀어 올렸다. 그의 왼쪽 손목에 찬 파텍필립 시계의 메탈 베젤이 차가운 햇빛을 받아 번뜩였다.


태성은 ‘오 집사 대면 시 시선 처리법’을 가동했다. 고개를 비스듬히 꺾은 채, 눈을 가늘게 뜨고 오 집사의 미간을 침묵 속에서 정확히 3초간 응시했다. 압도적인 신분적 우위와 오만함이 실린, 뼛속까지 시린 시선이었다.


오 집사는 그 3초의 침묵 동안 숨을 쉬는 것조차 잊은 채 굳어 버렸다. 마침내 태성의 입술 사이로 서늘하고 낮은 음성이 흘러나왔다.


“결과가 나온 모양이군, 오 집사.”


오 집사는 마른침을 삼키며 황급히 태블릿을 주머니에 넣고 고개를 숙였다.


“……예, 도련님. 본사 연구소로부터 공식 보고서가 도착했습니다. 회장님과의 유전자 감정 결과…… 완벽하게 일치하는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태성은 헛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어깨의 통증 때문에 몸이 일순간 경직되려 했지만, 초인적인 마인드 컨트롤로 신체 반응을 억누르며 거만하고 품위 있는 걸음걸이로 오 집사의 바로 앞까지 걸어왔다.


태성은 오 집사의 얼굴 바로 앞에 자신의 얼굴을 들이밀었다. 편광 렌즈 너머로 비치는 태성의 안광은 야수처럼 차가웠다. 전완부의 바늘 상처와 어깨의 통증이 그의 복수심을 더욱 날카롭게 벼려놓고 있었다.


“내 핏줄에 대해 더 의심할 부분이 남았나, 오 집사?”


오 집사의 이마에서 땀방울이 흘러내려 뺨을 타고 떨어졌다. 한성그룹의 수석 집사이자 베테랑 첩자가, 고작 열여덟 살짜리 서자 서지한의 기세에 완벽히 압도당해 어깨를 미세하게 떨고 있었다.


“아닙니다, 도련님. 제 불찰입니다. 감히 제가 도련님의 정통성을 의심한 것에 대해…… 깊이 사죄드립니다.”


태성은 오 집사를 내려다보며 속으로 차갑게 웃었다. 과학적 결과 앞에서는 그 어떤 오만한 권력자도 반박할 수 없다. 서태진과 오 집사가 파놓은 친자 불일치의 덫은, 자신이 목숨을 걸고 실행한 샘플 바꿔치기 작전에 의해 완벽한 방패막이로 역전되었다. 이제 그는 한성그룹의 공식적인 ‘서자 상속 후보’로서의 법적 정통성을 완전히 공인받은 것이었다.


그러나 승리의 여운을 만끽할 시간은 길지 않았다.


태성의 주머니 속에서 가벼운 진동이 울렸다. 한도현과의 비밀 연락망인 암호화된 투폰이 아니었다. 그의 교복 주머니 속에 들어있던 공식 스마트폰 화면에 아너스 국제학교 학생 자치망의 긴급 알림이 떠 있었다.


[긴급 공지: 아너스 학부모회장 송채경 여사의 발의로, 서지한 학생의 복학 자격 적정성 재심사를 위한 특별 징계 위원회가 내일 오전 소집됩니다.]


태성의 눈매가 순식간에 날카롭게 좁혀졌다.


서태진의 유전자 덫이 박살 나자마자, 이번에는 학내 세력인 송채경 학부모회장이 서지한의 과거 마약 및 사생활 문란 의혹을 빌미로 그를 학교에서 매장하려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태성은 안경테를 만지작거리며 창밖의 아너스 국제학교 본관 건물을 응시했다.


사냥개 한 마리를 굴복시켰더니, 이제는 더 거대한 맹수들이 이빨을 드러내며 달려들고 있었다. 하지만 태성의 입가에는 오히려 서늘한 미소가 걸렸다.


전쟁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었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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