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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초의 거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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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페인트로 칠해진 보건실 채혈실 내부는 지독하리만치 차갑고 정돈되어 있었다. 코끝을 찌르는 이소프로필 알코올의 알싸한 냄새가 좁은 공간을 가득 채웠다. 벽에 걸린 아날로그시계의 초침 소리만이 규칙적으로 방 안의 정적을 잘라내고 있었다.


째깍, 째깍, 째깍.


강태성은 채혈용 의자 가죽 시트에 몸을 깊숙이 묻은 채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 그의 가슴속에서는 심박수가 요동치려 했지만, 태성은 의식적으로 호흡의 템포를 늦췄다. 빈민가 시절 사채업자들의 칼날 앞에서 터득한 ‘극단적 마인드 컨트롤 및 심박 제어’가 발동되었다. 그의 심박수는 이내 폭풍 전야처럼 고요한 62bpm으로 내려앉았다.


태성의 맞은편, 하얀 의사 가운을 입은 보건 교사 정수아의 얼굴은 핏기가 가신 채 사색이 되어 있었다. 그녀의 손가락 끝이 쥐고 있는 채혈용 일회용 주사기가 위태롭게 흔들렸다. 미세하게 부딪히는 플라스틱 실린더 소리가 태성의 예민한 청각에 걸려들었다.


“지, 지한 도련님…… 정말로 이대로 진행해도 괜찮은 건가요? 만약 오 집사가 눈치채기라도 한다면, 저는…….”


정수아의 목소리는 울음소리에 가까웠다. 사설 도박판에 빠져 수억 원의 빚을 지고 벼랑 끝에 몰린 그녀를 태성이 거액의 현금으로 매수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녀의 내면에 도사린 한성그룹에 대한 공포는 쉽게 지워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태성은 무도수 금테 안경 뒤로 날카롭고 깊은 눈동자를 빛내며, 하 턱을 오만하게 들어 올렸다. 안나 장에게 가혹하게 훈련받은 ‘서지한’ 특유의 차갑고 거만한 미소가 입가에 매끄럽게 걸렸다.


“정 선생님. 이미 내 돈을 받아 아주머니 아들의 사채 빚을 청산한 순간부터, 아주머니는 내 공범이야. 여기서 도망칠 구멍 따윈 없어.”


태성은 중저음의 격조 높은 발성으로 정수아의 심장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그의 목소리는 나직했지만, 거부할 수 없는 지배자의 위압감이 실려 있었다.


“오 집사가 문밖에서 귀를 기울이고 있어. 쓸데없는 소리는 집어치우고, 지시한 대로 움직이기나 해.”


정수아는 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이마에 맺힌 식은땀이 차가운 형광등 불빛을 받아 번들거렸다.


그때였다. 태성의 왼쪽 손목에 채워진 파텍필립 한정판 시계가 미세한 진동을 울렸다.


징, 징.


두 번의 짧은 진동. 한도현이 보낸 신호였다. 학교 전산망 메인 서버를 해킹하여 보건실 내부의 CCTV 화면을 정확히 3초간 이전 루프 영상으로 고정했다는 뜻이었다. 오 집사가 모니터링 룸에서 보고 있을 화면은 아무 일도 없는 평온한 대기 상태로 고정되어 있을 것이다.


시간은 단 3초.


“지금이야. 움직여.”


태성의 나직한 명령과 동시에 정수아가 테이블 옆의 비밀 약품 캐비닛으로 손을 뻗었다. 캐비닛 안쪽 깊은 곳에는 주치의 김필중을 통해 극비리에 반입한, 식물인간 상태인 진짜 서지한의 진짜 혈액 샘플 앰플이 보관되어 있었다.


그러나 정수아의 손가락은 극심한 긴장감으로 인해 완전히 마비된 듯 보였다. 그녀가 앰플을 꺼내려다 그만 유리 튜브를 떨어뜨릴 뻔했다. 미끄러진 앰플이 캐비닛 선반 모서리에 부딪히며 가벼운 금속성 소음을 냈다.


탁!


태성의 동공이 순간적으로 수축했다. 그의 뇌세포가 초 단위로 폭발적인 계산을 시작했다.


‘정수아의 패닉이 작전의 최대 변수다. 내가 직접 통제해야 한다.’


태성은 망설임 없이 자신의 오른손을 뻗어 정수아의 덜덜 떨리는 손목을 강하게 쥐어 고정했다. 그의 손끝에서 느껴지는 정수아의 맥박은 미친 듯이 날뛰고 있었다. 태성은 그녀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미세 표정 분석을 통해 그녀가 가진 공포의 한계를 정확히 짚어냈다.


“정 선생님, 내 눈 똑바로 봐. 내가 준 수표로 아들을 살리고 싶으면, 내 손의 힘을 느껴.”


태성의 차갑고 단단한 손아귀 힘에 정수아의 손떨림이 일시적으로 멈췄다. 그녀가 간신히 진짜 서지한의 혈액 앰플을 움켜쥐었다.


바로 그 순간, 채혈실의 하얀 문고리가 거칠게 돌아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철컥, 철컥.


“도련님, 채혈이 너무 지체되는군요.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들어가겠습니다.”


문밖에서 들려오는 오 집사의 매서운 목소리. 그의 무거운 군화 소리가 문턱 바로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오 집사는 복도에서의 기만책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의심의 끈을 놓지 않고 기습 진입 타이밍을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남은 시간은 1초도 되지 않았다.


태성은 반사적으로 체육복 왼쪽 소매 안쪽 겨드랑이 밴드 틈새에 숨겨두었던 진짜 서지한의 혈액 앰플을 향해 손가락을 미세하게 움직였다.


그러나 다급한 움직임 속에서 그의 왼쪽 어깨가 채혈 의자의 날카로운 철제 프레임에 강하게 부딪혔다.


쾅!


“윽……”


신경을 찌르는 날카로운 통증이 척추를 타고 뇌리로 솟구쳤다. 체육 시간 락커룸에서 남궁철과의 충돌로 인해 이미 타박상을 입고 미세하게 찢어져 있던 가짜 실리콘 흉터의 가장자리가 이번 충격으로 인해 완전히 찢어지며 살을 파고드는 듯한 경미한 가려움증과 통증을 유발했다.


등 뒤로 식은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지만, 태성은 이를 악물고 통증 반응을 인위적으로 억제했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차가운 얼음 가면처럼 고요했다.


0.1초의 찰나.


태성은 소매 속 자석 패드에서 분리해 낸 진짜 서지한의 혈액 앰플을 정수아의 손에 쥐여주었고, 동시에 그녀가 들고 있던 태성의 진짜 피가 담긴 주사기를 자신의 체육복 소매 깊숙한 곳으로 밀어 넣었다. 완벽한 신체 제어력과 0.1초의 기적적인 바꿔치기 타이밍이었다.


그 극단적인 긴장감 속에서 정수아가 주사 바늘을 수거함에 넣으려다, 실수로 태성의 forearm(전완부)을 날카롭게 긁고 말았다.


찌익.


하얀 피부 위로 한 줄기 붉은 피가 배어 나왔다.


“도련님!”


정수아가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채혈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스르륵.


은테 안경 너머로 번뜩이는 매서운 눈빛을 지닌 오 집사가 방 안으로 성큼 걸어 들어왔다. 그의 시선은 채혈실 내부의 공기를 해부하듯 샅샅이 훑어내렸다. 정수아는 사색이 된 얼굴로 진짜 서지한의 피가 담긴 채혈관을 라벨링 장비에 꽂아 넣고 있었고, 태성은 한쪽 눈썹을 찡긋하며 오 집사를 쏘아보았다.


“무례하군, 오 집사. 노크도 없이 내 채혈실에 들이닥치다니. 한성그룹의 수석 집사라는 자가 예법을 어디로 배운 거지?”


태성은 상류층 발성과 오만한 태도를 유지하며 오 집사의 기세를 완전히 꺾어버렸다. 오 집사의 시선이 태성의 팔에 맺힌 붉은 핏자국과 알코올 스왑으로 피를 닦아내는 정수아의 떨리는 손끝에 꽂혔다.


“……도련님, 채혈 도중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 신변 보호를 위해 진입했습니다. 정 선생님, 손이 많이 떨리시는군요.”


오 집사가 한 걸음 더 다가오며 테이블 위의 주사기 수거함과 약품 캐비닛을 예리하게 관찰했다. 태성은 자신의 왼쪽 손목에 찬 파텍필립 시계를 슬쩍 흔들며 차갑게 내뱉었다.


“정 선생님이 서투른 주사 바늘로 내 팔을 긁었을 뿐이야. 고작 이따위 실수를 감시하겠다고 내 사생활을 침해하는 건가? 오 집사, 네가 서태진 부회장의 명령을 빌미로 어디까지 기어오를 수 있는지 내 똑똑히 기억해 두지.”


태성의 서늘한 안광과 대영그룹을 인용한 서지한 특유의 히스테리적 경고 앞에 오 집사의 턱 끝 근육이 미세하게 경직되었다. 그는 결국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죄송합니다, 도련님. 제 불찰입니다.”


채혈실 내부에 흐르는 침묵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정수아는 간신히 라벨링을 마친 서지한 명의의 채혈관을 특수 봉인 용기에 담아 고정했다. 이제 이 샘플은 서태진 부회장의 수하들이 대기하고 있는 국가공인 유전자 연구소로 즉송될 예정이었다.


태성은 찢어진 실리콘 흉터의 쓰라린 통증을 견디며, 안경 너머로 멀어져 가는 채혈 봉인함을 응시했다.


현장에서의 샘플 바꿔치기는 기적적으로 성공했다. 하지만 이 피가 서울의 연구소에 도착해 최종 판정 보고서가 출력될 때까지는, 그의 목줄을 죈 시한폭탄의 초침은 멈추지 않을 터였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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