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범의 계약
새벽의 서늘한 공기가 에메랄드 빌라의 대리석 바닥을 타고 소리 없이 올라왔다. 어스름한 안개 너머로 제주의 거친 바다 냄새가 미세하게 섞여 드는 시간. 강태성은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무도수 금테 안경을 손가락 끝으로 가볍게 밀어 올렸다. 안경의 특수 편광 코팅 렌즈 너머로 비치는 그의 눈빛은 지독하리만치 차갑고 가라앉아 있었다.
어젯밤, 가사 도우미 이 메이드와의 일촉즉발의 대치는 태성의 승리로 끝났다. 품속 깊은 곳에 회수해 둔 진짜 주민등록증이 담긴 낡은 가죽 지갑의 감촉이 단단하게 느껴졌다. 비록 한미정의 비상 자금 중 1억 원이라는 거액을 사적으로 방출해야 하는 뼈아픈 재정적 지출이 있었지만, 빌라 내부의 가장 취약한 감시망을 완벽한 우군이자 이중 스파이로 포섭한 대가치고는 그리 비싼 편이 아니었다.
사락, 사락.
침실 문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리더니, 약속된 세 번의 가벼운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태성이 소리 없이 걸어가 문을 열자, 잔뜩 주눅 든 어깨를 웅크린 이 메이드가 초조하게 주변을 살피며 서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갓 다려진 아너스 국제학교의 남색 교복 재킷이 들려 있었다.
“도련님…….”
이 메이드의 목소리는 덜덜 떨리고 있었다. 태성은 그녀의 입술 미동과 흔들리는 눈동자를 정밀하게 스캔했다. 공포와 구원이 이중으로 새겨진 얼굴. 그녀는 이제 태성의 완벽한 손아귀에 쥐여 있었다.
“말해.”
태성은 서지한 특유의 오만하고 절제된 중저음으로 낮게 내뱉었다.
“어젯밤 늦게…… 오 집사님이 본채 복도를 몇 번이나 서성이셨어요. 청자 화병 소리가 났던 자리를 손전등으로 비춰보면서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 계시더라고요. 그리고 새벽에는 서울의 서태진 부회장님 비서실과 아주 비밀스럽게 통화하는 소리를 들었어요. 오늘 아침 신체검사에서…… 도련님의 채혈 샘플이 확보되는 즉시 임 국장의 연구소로 직송할 수 있도록 준비를 끝내라는 내용이었어요.”
태성의 눈매가 날카롭게 좁혀졌다. 역시 오 집사는 어젯밤의 소동을 완전히 지우지 못했다. 그리고 서태진은 오늘 신체검사를 통해 자신을 사기죄로 기소하고 한미정의 목줄까지 통째로 쥐려는 거대한 덫을 완성해 둔 상태였다.
“잘했어, 이 씨 아주머니. 앞으로도 오 집사가 움직이는 동선과 통화 내용은 가장 먼저 나에게 보고해. 아주머니 아들의 사채 빚은 오늘 오전 중으로 완벽히 청산될 테니까, 한눈팔 생각은 접는 게 좋을 거야.”
“네, 네…… 도련님. 제발 아들만은 살려주세요. 절대로 입을 열지 않겠습니다.”
이 메이드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숙인 뒤, 다려진 재킷을 건네고 소리 없이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태성은 문을 닫고 옷장 안쪽의 비밀 공간에서 주치의 김필중이 극비리에 수급해 준 진짜 서지한의 혈액 앰플을 꺼냈다. 저온 보존 용기에서 꺼낸 차가운 유리 앰플 속의 붉은 액체. 이것이 오늘 그가 보건실에서 자신의 피와 바꿔치기해야 하는 생명선이었다.
태성은 체육복 소매 깊숙한 곳 안감에 한도현이 특별히 장착해 준 초소형 자석 패드를 확인했다. 앰플의 금속 캡을 자석에 붙이자, 소매를 격렬하게 흔들어도 겉으로는 전혀 티가 나지 않게 단단히 고정되었다. 이어 교복 재킷의 두 번째 단추 뒤에 숨겨진 초소형 GPS 추적기의 상태를 스마트폰으로 점검했다. 최후의 납치나 감금 상황에 대비한 이중 안전장치였다.
마지막으로 그는 비타민제 통에서 신경안정제 디아제팜 한 알을 꺼내 물 없이 삼켰다. 식도가 타들어 가는 듯한 쓴맛이 혀끝을 마비시켰지만, 심장 박동은 이내 느린 템포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심박수 62. 극단적인 마인드 컨트롤이 가동되며 감정이 완벽하게 차단되었다.
“가자, 진짜 지옥으로.”
***
아너스 국제학교의 아침은 지독하리만치 차갑고 정돈되어 있었다. 웅장한 유럽풍 석조 건물들 사이로 짙은 해무가 몰려와 교정을 집어삼키고 있었고, 등교하는 최고급 리무진들의 행렬은 소리 없는 계급 전쟁의 서막을 알리는 듯했다.
태성이 리무진에서 내리자, 대기하고 있던 오 집사가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다가와 그를 보좌했다. 오 집사의 은테 안경 너머로 번뜩이는 눈빛은 평소보다 훨씬 예리하게 살아있었다. 오늘 반드시 태성의 유전자 샘플을 낚아채겠다는 사냥개 특유의 집요한 탐욕이 서려 있었다.
“도련님, 오늘 정기 신체검사는 학무처와 이사회의 특별 지침에 따라 보건실에서 아주 엄격하게 진행될 예정입니다. 제가 채혈실 입구까지 직접 보좌하겠습니다.”
“쓸데없는 참견이군, 오 집사. 고작 피 한 번 뽑는 일에 네가 왜 그렇게 호들갑을 떠는지 모르겠어.”
태성은 어깨를 거만하게 뒤로 젖히고 오만한 걸음걸이로 복도를 걸어갔다. 왼쪽 손목에 채워진 파텍필립 한정판 시계가 차가운 복도 조명 아래에서 날카로운 금속성 광택을 뿜어냈다.
본관 1층 서쪽 끝에 위치한 보건실 앞 복도는 이미 신체검사를 대기하는 골드 등급과 실버 등급의 학생들로 붐비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눈빛에는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서태진의 지시를 받은 이사장 일파가 이번 신체검사의 보안 등급을 비정상적으로 높여두었기 때문이었다. 복도 곳곳에 사설 경호원들이 삼엄하게 배치되어 있었고, 보건실 내부로 들어가는 학생들은 철저한 신원 확인을 거쳐야 했다.
태성은 한도현이 투폰으로 보내온 보건실 내부 도면과 마스터 코드를 머릿속으로 다시 한번 복기했다. 매수된 보건 교사 정수아가 안쪽 채혈실에서 대기하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녀에게 접근하기 전, 가장 거대한 물리적 장벽이 그의 바로 옆에 서 있었다.
오 집사.
그는 태성의 반 보 뒤에서 그의 미세한 호흡 변화와 손가락의 움직임 하나까지 관찰하고 있었다. 태성의 왼쪽 어깨에 찢어진 가짜 실리콘 흉터의 감촉이 미세하게 신경을 자극했다. 만약 소지품 검사나 물리적 접촉이 발생한다면 흉터는 물론이고, 소매 속에 고정해 둔 진짜 서지한의 혈액 앰플이 고스란히 노출될 판이었다.
‘여기서 꼬리가 밟히면 끝이다.’
태성은 디아제팜의 힘으로 강제로 억눌러둔 심장을 느끼며, 보건실 문앞으로 한 걸음씩 다가갔다. 보건실의 하얀 문이 단 3미터 앞으로 다가왔을 때였다.
탁.
묵직한 손 하나가 태성의 오른쪽 어깨를 강하게 움켜잡았다.
태성은 반사적으로 몸을 돌렸다. 오 집사였다. 그의 은테 안경 너머로 드러난 눈동자는 더 이상 집사의 비굴한 미소를 담고 있지 않았다. 그것은 먹잇감의 목덜미를 물어뜯기 직전의 잔인한 사냥개의 눈빛이었다.
“도련님. 들어가시기 전에 소지품을 잠시 검사하겠습니다.”
오 집사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복도의 소음을 뚫고 태성의 귀청을 때렸다. 주변에 서 있던 몇몇 귀족 자제들의 시선이 순식간에 두 사람에게 집중되었다.
“무슨 짓이지, 오 집사? 네가 미쳤구나.”
태성은 서지한의 7대 습관 프로토콜을 가동했다. 하 턱을 오만하게 치켜올리고, 눈동자를 가늘게 뜨며 오 집사의 미간을 침묵으로 응시했다. 안나 장에게 혹독하게 배웠던, 상대방을 벌레 보듯 내려다보는 초상류층 특유의 압도적인 아우라였다.
하지만 오 집사는 이번만큼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서태진 부회장으로부터 ‘오늘 무슨 일이 있어도 샘플의 진위 여부를 현장에서 확보하라’는 최종 명령을 받은 상태였다.
“부회장님의 직속 안전 지침입니다. 최근 학내 보안 위협이 증가하여, 도련님의 신변 보호를 위해 보건실 진입 전 모든 개인 소지품과 전자기기를 일시 회수하라는 지시가 있었습니다. 협조해 주십시오.”
오 집사의 손가락이 태성의 교복 주머니 쪽으로 강제로 뻗어왔다. 그의 손끝이 태성의 체육복 소매 가장자리에 닿기 일보 직전이었다. 만약 오 집사의 손이 소매 안쪽의 자석 패드에 닿는 순간, 차가운 유리 앰플의 형태가 그대로 탄로 날 터였다.
절체절명의 위기. 태성의 목덜미 경동맥이 미세하게 떨리며 뇌세포가 초 단위로 폭발적인 계산을 시작했다.
‘상대가 숨겨진 진짜 물증을 찾으려 할 때는, 더 미심쩍고 화려한 가짜 미끼를 스스로 던져주어 상대의 사냥개 같은 수색 욕구를 일차적으로 충족시켜야 한다.’
밑바닥 슬럼가에서 사채업자들의 기습 수색을 피하며 몸으로 터득했던 생존의 법칙이 태성의 손끝을 움직였다.
스윽.
태성은 오 집사의 손이 소매에 닿기 직전, 자신의 안주머니로 손을 넣어 묵직한 물건 하나를 거칠게 꺼냈다. 그리고 그것을 오 집사의 눈앞에 대담하게 흔들어 보였다.
한도현이 군용 등급으로 개조해 준, 일반적인 상류층 자제들은 결코 소지할 리 없는 검은색 하드웨어 보안 칩이 박힌 암호화된 투폰이었다.
“이걸 찾나, 오 집사?”
태성의 차가운 목소리가 이사회실의 판결처럼 복도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오 집사의 매서운 눈빛이 순간적으로 태성의 소매에서 벗어나, 기괴한 외관을 지닌 검은색 위성 투폰으로 쏠렸다. 그의 집사로서의 지식과 첩자로서의 본능이 동시에 그 전자기기의 수상한 주파수를 감지하고 굳어버린 것이다.
오 집사의 시선이 완벽하게 투폰에 묶인 단 1.5초의 찰나.
태성은 투폰을 쥔 오른손을 높이 들어 올리는 척하며, 자연스럽게 왼쪽 어깨를 뒤로 빼고 왼팔 소매를 미세하게 흔들었다. 소매 안쪽의 자석에 붙어 있던 혈액 앰플이 태성의 정교한 손목 스냅에 의해 소매 깊숙한 겨드랑이 안쪽의 고정 밴드 틈새로 부드럽게 미끄러져 들어갔다. 완벽한 위치 재조정이었다. 이제 오 집사가 소매 끝을 만진다 해도 아무것도 만져지지 않을 터였다.
“이건…… 도련님, 이 전자기기는 무엇입니까? 도련님의 공식 소지품 목록에는 이런 군용 장비가 등록되어 있지 않습니다만.”
오 집사가 의심 어린 눈빛으로 투폰을 빼앗으려 손을 뻗었다. 태성은 조소 섞인 헛웃음을 지으며 투폰을 다시 안주머니 깊숙이 집어넣었다.
“내 개인 사생활까지 일일이 한성그룹 부회장실에 보고해야 할 의무는 없어, 오 집사. 네가 내 약혼녀인 윤설아와의 은밀한 연락 채널까지 검열하겠다면, 당장 대영그룹 법률팀을 불러 가문 간의 정식 항의 서한을 발송해 주지. 네가 감히 서태진의 이름 뒤에 숨어 내 몸에 손을 대려 한 대가가 무엇인지, 오늘 밤 똑똑히 보게 될 거다.”
태성의 서늘한 안광과 대영그룹이라는 거대한 배경을 인용한 프레임 전환에 오 집사의 손가락이 공중에서 멈춰 섰다. 주변의 학생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커지자, 오 집사는 결국 한 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의 이마에 미세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무례를 범했습니다, 도련님. 들어가시지요.”
오 집사가 허리를 숙이며 보건실 문을 열었다.
태성은 파손되어 임시 복구된 무도수 금테 안경을 한 번 차갑게 치켜 올린 뒤, 보건실 내부로 걸어 들어갔다.
하얀 문이 뒤쪽에서 무겁게 닫히는 순간, 코끝을 찌르는 알코올 냄새와 함께 차가운 정적이 태성을 맞이했다.
채혈실 안쪽 테이블 뒤편.
하얀 의사 가운을 입은 보건 교사 정수아가 주사 바늘을 든 채 앉아 있었다. 태성이 다가오는 모습을 바라보는 그녀의 떨리는 손가락 끝이 주사기 실린더를 위태롭게 흔들고 있었다.
태성은 소매 속 겨드랑이에 고정된 진짜 서지한의 혈액 앰플을 느끼며, 그녀의 바로 앞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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