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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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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을 쓴다는 것은 단순히 얼굴을 가리는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골수 깊숙이 박힌 스스로의 궤적을 부정하고, 타인의 영혼을 가죽째 뒤집어쓰는 기괴한 의식에 가깝다.


서귀포의 푸른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제주 에메랄드 빌라의 거실. 강태성은 통유리창 너머로 부서지는 파도를 바라보며 무도수 금테 안경을 가볍게 밀어 올렸다. 손가락 끝에 닿는 차가운 금속의 감각이 현실을 일깨웠다. 맞춤형 아너스 국제학교 교복 재킷은 깃털처럼 가벼웠지만, 그의 어깨를 보이지 않는 쇠사슬처럼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나는 강태성이 아니다.’


태성은 속으로 그 문장을 주문처럼 되뇌었다. 거울 속에 비친 소년은 단정하게 자른 흑발에 날카롭고 깊은 눈동자를 지니고 있었다. 온실 속에서 자란 귀족의 아우라. 하지만 그 껍데기 아래 숨겨진 본질은 서울 밑바닥 빈민가에서 사채업자들에게 짓밟히며 자라난 야수였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태성의 삶은 곰팡이 냄새나는 반지하 방과 사채업자 독사의 거친 구두 굽 아래에 있었다. 도박에 미쳐 막대한 빚을 남기고 증발해 버린 아버지. 그리고 신부전증으로 가평의 차가운 사설 병원에 누워 죽어가는 어머니 이신혜. 독사 일당이 반지하 방의 문을 부수고 들어와 어머니의 장기 포기 각서를 내밀었을 때, 태성은 세상의 밑바닥이 얼마나 차갑고 축축한지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 지옥의 한복판에서 구원의 밧줄을 내민 것은 한미정이었다.


한성그룹의 서녀이자, 의문의 교통사고로 식물인간이 되어 버린 서지한의 친모. 그녀는 태성의 얼굴과 골격이 자신의 아들과 기가 막히게 닮았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은밀한 제안을 건넸다.


“내 아들의 대역이 되어라. 한성그룹의 서자, 서지한으로 살아. 네 어머니의 모든 치료비와 사채 빚은 내가 해결해 주지. 하지만 명심해. 단 한 순간이라도 네 진짜 본색을 드러내거나 계약을 위반하는 순간, 네 어머니의 산소호흡기는 떨어질 것이고 너는 독사의 손에 넘겨질 테니까.”


그것은 구원의 탈을 쓴 악마의 계약이었다. 태성은 장기판의 말에 불과한 대역 계약자 신분으로 그 제안을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그 후 이어진 100일간의 지옥 훈련. 스타일 코치 안나 장은 태성의 몸에 밴 가난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채찍을 들었다.


“걸음걸이가 왜 그렇게 조급하지? 가난한 자들은 늘 쫓기듯 걷지. 상류층의 걸음걸이는 템포가 달라. 하 턱을 살짝 들어 올리고, 어깨를 거만하게 뒤로 젖혀. 네가 세상의 지배자라는 눈빛으로 상대를 내려다봐!”


안나 장의 가혹한 훈련 아래 태성은 서지한의 발성과 걸음걸이를 완벽히 싱크로해 나갔다. 식사 시 포크를 쥐는 미세한 각도, 커피를 마실 때 잔을 내려놓는 횟수, 심지어 거짓말을 할 때 오른쪽 눈썹을 미세하게 찡긋하는 서지한 특유의 습관까지 모사하는 ‘서지한의 7대 습관 프로토콜’을 골수까지 주입했다.


그리고 오늘, 태성은 진짜 서지한의 위장 신분으로 제주 에메랄드 빌라에 입성했다. 연간 학비가 수억 원에 달하는 초호화 아너스 국제학교의 입학을 단 하루 앞둔 날이었다.


사락, 사락.


거실의 고요함을 깨뜨리는 가벼운 발소리가 들려왔다. 태성은 반사적으로 몸을 경직시키려 했지만, 이내 안나 장의 훈련을 떠올리며 어깨의 힘을 빼고 거만한 태도로 소파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도련님, 여정은 피곤하지 않으셨습니까.”


정돈된 집사복을 입고 머리를 칼같이 빗어 넘긴 노신사가 다가왔다. 한성그룹에서 파견된 수석 집사이자, 서태진 부회장의 숨은 첩자인 오 집사였다. 은테 안경 너머로 번뜩이는 그의 예리한 안광은 태성의 일거수일투족을 해부하듯 훑어내리고 있었다. 오 집사는 태성의 아주 미세한 행동 불일치라도 포착해 서울의 서태진 부회장에게 보고할 사냥개였다.


“피곤이라니. 오 집사, 내가 고작 제주도까지 내려오는 길에 지칠 만큼 유약해 보이나?”


태성은 안나 장에게 배운 품격 있는 중저음의 발성을 가동했다. 턱을 비스듬히 꺾은 채 오 집사의 미간을 침묵으로 3초간 응시하는 ‘오 집사 대면 시 시선 처리법’을 정확히 구사했다. 기가 죽지 않는 오만한 태도. 그것이 서지한의 본질이었다.


오 집사의 미간이 아주 미세하게 움찔했다. 하지만 그는 이내 노련하게 미소를 지으며 들고 있던 쟁반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쟁반 위에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영국식 웰컴 티가 담긴 최고급 도자기 찻잔이 놓여 있었다.


“과연 도련님이십니다. 런던에서 요양하시는 동안 기세를 완전히 회복하신 것 같아 이 늙은이의 마음이 놓입니다.”


오 집사가 차를 한 잔 따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그 목소리 이면에 숨겨진 칼날은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도련님,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예전에 런던으로 떠나시기 전, 에메랄드 빌라에서 마시던 다즐링에는 항상 유기농 비정제 설탕 세 스푼을 넣어 드시곤 하셨지요. 오늘도 그렇게 준비해 드릴까요?”


태성의 등덜미로 차가운 소름이 돋았다. 머릿속에서 경보음이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함정이다.’


태성은 소매 속에 숨겨둔 주머니를 만지작거렸다. 그 안에는 매일 밤 복용하는 신경안정제 디아제팜 통이 들어 있었다. 심박수가 폭증하려 하자, 태성은 인위적으로 호흡을 제어하며 극단적 마인드 컨트롤을 시도했다.


서지한의 비밀 일기장에 기록된 내용이 찰나의 순간 뇌리를 스쳤다. 진짜 서지한은 단 음식을 극도로 혐오했다. 특히 차에 설탕을 넣는 행위는 ‘천박한 졸부들의 짓’이라며 경멸하곤 했다. 오 집사는 지금 서지한의 과거 습관을 날조하여 태성이 가짜인지 검증하려 드는 것이다.


태성은 찻잔을 바라보며 나른하게 헛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안경테를 가운데 손가락으로 가볍게 밀어 올리며 차가운 음성으로 받아쳤다.


“오 집사. 네 늙은 머리가 벌써 치매라도 걸린 모양이군. 내가 차에 설탕 따위의 천박한 백색 가루를 섞는 걸 본 적이 있었던가? 한미정 여사가 내 입맛의 사소한 취향까지 감시하라고 널 보낸 건 아닐 텐데.”


칼날 같은 독설. 오 집사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태성이 완벽하게 그의 유도 질문을 간파하고 서지한 특유의 오만한 아우라로 받아친 덕분이었다. 오 집사는 허리를 숙이며 낮게 읊조렸다.


“늙은이의 기억력이 온전치 못해 무례를 범했습니다. 혜량해 주시옵소서, 도련님.”


오 집사는 찻잔을 태성의 앞으로 조심스럽게 밀어놓았다. 주도권을 뺏긴 듯한 굴복의 태도. 하지만 그의 매서운 안광은 여전히 태성의 손끝을 향하고 있었다.


태성은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하며, 우아하게 차를 한 모금 마시기 위해 오른손을 뻗었다. 긴장감 속에서 목이 타들어 가고 있었기에 본능적으로 따뜻한 음료를 원했다.


스윽.


태성의 손가락이 도자기 찻잔의 손잡이를 향해 뻗어 나갔다. 그리고 찻잔을 쥐는 순간.


쿵.


태성의 가슴이 내려앉았다. 손끝에 닿는 감각과 동시에 머릿속에 안나 장의 호된 호통 소리가 환청처럼 울려 퍼졌다.


‘서지한은 손가락 관절의 미세한 이상 때문에, 혹은 상류층 특유의 뒤틀린 선민의식 때문에 찻잔 손잡이 구멍에 절대 손가락을 집어넣지 않아! 오직 엄지와 검지 끝으로 손잡이 바깥쪽을 가볍게 꼬집듯 쥐어 들어 올린단 말이다!’


하지만 태성의 손가락은 이미 깊숙이 찻잔 손잡이 구멍을 관통해 움켜쥐고 있었다. 18년간 흙수저 강태성으로 살아가며, 공사장에서 뜨거운 종이컵을 움켜쥐던 억센 밑바닥의 신체 기억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튀어나온 것이었다.


아차 하는 순간, 태성은 황급히 손가락을 빼내려 했지만 이미 늦어 버렸다.


스르륵.


오 집사의 시선이 태성의 손가락 끝으로 고정되었다. 그의 은테 안경 너머로 번뜩이던 매서운 눈빛이 순식간에 얼음장처럼 차갑게 굳어지는 것이 보였다. 거실을 감돌던 따뜻한 차 향기가 일순간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싸늘한 살기로 변해 태성의 목을 죄어왔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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